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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정 Nov 13. 2020

다 잘하라고 해서 미안해

  20살에 대학에 입학했고 중간에 휴학기를 거치고 25살에 대학을 졸업했다. 그 사이 괜히 집에서 나가고 싶어 2년 반 동안 자취도 해봤다. 운 좋게 졸업 전 취업을 했기 때문에 졸업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직장에 출근을 했다. 이제 나 용돈 줄 일이 없어 다행이라며 부모님은 내가 8살 때부터 운영하던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가장 큰, 다사다난했던 당구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괜히 잔정이 많아, 할아버지는 80년의 세월을, 나는 20년의 세월을 보낸 한옥 집을 떠날 때도 눈물이 났는데 가게를 정리하는 아빠를 보면서도 괜히 그렁그렁해졌다. 바닥 타일이 한 장씩 떨어져나갈 때마다 그 간의 추억들이 생각났다. 바쁜 엄마의 잠깐 가게 좀 보라는 전화에 온갖 짜증을 내며 가게로 들어와 일을 돕던 것, 카운터에 엎드려 잠이 들어버려 손님들이 계산을 기다리던 것, 갑자기 에어컨 물이 새 창고에 물을 퍼내던 것들 등등 이런 일 저런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부모님이 덜 힘들어질 것이라는 것에 다행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마지막 작업을 하던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18년을 운영하던 사장님으로서 소감이 어때?” 동네 토박이인 우리 아빠에게 당구장은 어릴 적 친구들과의 아지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활짝 웃으며 “너무 좋아.” 라고 했다. 눈치가 빠른 나지만 아직도 그 “좋아”의 진짜 의미는 잘 모르겠다. 암튼 그렇게 한 시름 덜어진 엄마와는 술을 한 잔 하기로 했다. 일단 세상에서 제일 센 우리 엄마에 대해 소개를 하고 싶다.     


  엄마는 술을 좋아한다. 가족 내력으로 맥주 두 캔이면 적당히 알딸딸하게 기분 좋아질 수 있다. 그리고 엄마는 바쁘다. 얼마나 바쁘냐면 병원 갈 시간도 없다. 어쩔 때는 차에서 끼니를 챙길 때도 있다. 오래 운영하던 당구장을 정리한 이후에 자연스레 엄마랑 집에 있게 되는 시간이 조금 늘어나게 됐는데, 1년 반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집에서 엄마랑 시간을 보내는 게 조금 어색하다. 가끔 밖에 정처 없이 돌아다닐 때 엄마에게서 전화가 온다. “어디 좋은 데 가서 점심 먹을래?” 항상 시간이 맞지 않았고 나는 정 없게 “나 밖이야.”라며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엄마는 본인 생각을 할 줄 모른다.      


  엄마의 고향은 제주도다. 외할아버지의 자식사랑으로 사남매가 어릴 적부터 서울 유학생활을 했다. 그래서 학창시절에는 방학때, 사회인이 된 이후에는 고향에 거의 가지 못했다. 엄마는 엄마의 엄마, 아빠는 자주 못 만났다는 것이다. 보통 외가 친척들과 친하다는데, 나는 어색하다. 자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지만. 외할아버지는 10년 전에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는 제주로 내려가 살고 있는 이모와 함께 있다. 엄마는 “제주도 한 번 다녀올까?” 라고 말한다. 말만 한다. 나는 “갔다 오라니깐. 안와도 되고.” 라는 장난을 친다. “아냐, 할머니 할아버지 힘들어.” 숨이 콱 막힌다. “뭐가 힘들어. 나 있잖아. 그냥 갔다가 와. 오래 있다가 와. 뭘 그렇게 많이 생각해. 엄마 나는 진짜 답답해.” 짠한 마음에 괜히 짜증을 낸다. 그러면 항상 엄마는 “니가 엄마냐?” 라고 말하며 웃어 넘기곤 한다.      


  어쨌든 엄마랑 술을 마시러 가기로 했다. 어색한 자리다. 집에서 맥주 한 잔도 아니고 운동을 하자고 나가서 는 다리를 건너서 한강뷰가 보이는 술집에 자리를 하고 앉았다. 그렇게 술 못하는 모녀는 소맥을 마시고 취했다. 안주가 맛이 있냐니 없냐니 누가 골랐냐니 티격태격 대다가 엄마의 한 마디로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공주(엄마가 나를 부르는 애칭이니 이해 바란다), 다 잘하라고 해서 미안해.”

“뭐야 갑자기.”

“너 유치원 때부터 영어 공부시키고, 하기 싫다는 것도 억지로 시키고 시험 문제 하나 틀려도 칭찬 안 해주고 혼내켰잖아. 니가 잘나야 너 스스로가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던 거야. 근데 생각해보니깐 그런 과정 속에서 많이 힘들었을 것 같더라고. 네가 애기인걸 까먹었고 살았었나봐. 미안해”

“아이 됐어. 쫌 힘들었긴 했지만 괜찮아. 나 학원 다니면서 동네 친구도 제일 많이 사귀고 나처럼 이것저것 많이 할 줄 아는 애도 없을걸! 됐어. 나 진짜 잘났으니깐. 일단 쉬마려우니깐 화장실 갔다올게.” 시크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한평생 너무나도 듣고 싶은 말이었다. 남 앞에서 울지 않는 나는 남은 아니지만 엄마 앞에서는 특히나 그 다짐을 백 번은 더 한다. 엄마가 울지말라고 가르친 탓도 있지만 엄마 앞에서 울기는 왠지 싫다. 엄마 마음속에 눈물이 더 많이 고였을 것 같아서였다. 어쨌든 화장실에 가서 짧은 시간 동안 효율적으로 펑펑 울었다. 테이블로 돌아와서 보니 엄마도 그런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 잘해야 된다’는 부담감 때문에 숨이 안 쉬어질 때도 있었다. 티는 안냈지만 뭔가 일이 안 풀리면 이것밖에 못하냐고 스스로를 구박했다. 더 이상 구박도 힘들어질 때면 ‘엄마 때문이야. 엄마가 잘하라고 해서.’ 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엄마한테 말하진 않았다. 엄마에게 “엄마, 나 힘들어.”라고 하면 100번이면 100번 모두 “남들도 힘들어.” 라는 답변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어릴 때 그 답변이 너무 서운해서 ‘내가 다시는 엄마한테 뭐 하나라도 말하나 봐라.’ 라는 오기를 부렸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에겐 뭐든지 오케이인 아빠에게만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자존심 부리는 것과 반대로 엄마는 나와 다툰 후에 그 센 자존심을 내려놓곤 한다. ‘잘못한 사람이 당연히 사과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높은 코를 우쭐대는 나는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어린애였다. 가끔 밖에서 진짜 땅으로 꺼져버릴 만큼 힘이 든 날에는 엄마가 이전에 보낸 카카오톡 편지들을 다시 읽어본다.      


  가장 최근에 받은 공주편지 하나를 공유하고 싶다.

‘어쩌다보니 새벽 네 시에 잠에서 깨 이러고 있다. 늘 네가 그 누구보다 편안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내 소중한 공주, 늘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지금의 이 기호를 발판으로 좀 더 성숙한 사람, 좀 더 멋진 사람이 되길 바랄게. 오늘도 행복한 날 보내^^’     

대답은 “응. 땡큐.” 이런 식으로 밖에 하지 못했지만 언제든 나를 다시 일어서게 만든다는 것에는 한 치의 거짓 없이 말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삶의 동기부여가 존재할 것이지만 나와 엄마는 서로가 삶의 이유이다.      


  이제는 “남들도 힘들어.”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엄마가 그렇게 찾던 “남”은 엄마 자신이었다. 나만큼이 아니라 나보다 훨씬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오기는 부리지 않기로 했다. 나는 여전히 비밀이 많은 딸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더 사랑하고 더 이해하기로 했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나의 이야기, 엄마의 이야기, 나와 엄마의 이야기가 동정이 아닌 응원을 불렀으면 하는 바람으로 나의 흔들리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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