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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정 Nov 19. 2020

미션 3 : 생각보다 약하고 생각보다 강하게

 5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제주도에서 험난한 운전을 무사히 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다음 날이었다. 잘못 안내한 내비게이션을 따라 구불구불한 커브길에 들어섰다. 전 날 눈발로 인해 길은 온통 진흙밭이었다. 조금 더 천천히 가야겠다고 살짝 브레이크를 밟은 순간 차는 순식간에 건너편 차도로 180도 회전하면서 산기슭에 박혀버렸다. 정말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다. 나와 친구 세 명의 “어어어!” 소리와 함께 사고가 났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던 것은 반대편은 낭떠러지였는데 그쪽으로 차가 돌지 않은 것, 건너편 차도에 차가 한 대도 없었던 것이다. 사고처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지나가시던 천사 같은 분이 차에서 내리셔서 본인 어렸을 때가 생각난다며 레카차 견인, 렌터카 회사 전화까지 모두 도와주셨다. 운전자였던 나는 놀라고 다친 것은 둘째치고 동승했던 친구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후에 사고처리 과정에서 한 친구와 서로의 서운함이 쌓여 다투기도 한 탓도 있지만 미안하고 무서운 마음에 다시는 운전대를 잡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렇게 2년 정도는 운전을 하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운전 한 번 해보지?” “나 못하는 거 알잖아. 운전 안 할 거야.” 라며 괜히 짜증을 냈다. “이겨내야지, 바보같이 그거 하나 못 이겨내?” 엄마의 도발에 발끈했다. “그래~ 하면 되잖아.” 라며 손을 부들부들 떨며 운전대를 잡았다. 나에겐 트라우마로 남은 운전이었다. 그렇게 하루에 10분, 15분, 조금씩 시간도 늘려봤다. 이제는 고속도로를 쌩쌩 달려도 여유롭다. 틀어놓은 노래도 흥얼거리며 혼자 드라이브도 다닌다. 한 번을 못 이겨냈다면 ‘혼자 드라이브하며 노래 듣기’라는 나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찾지도 못할 뻔했다.    

 

  나의 차 사고 트라우마는 잘 이겨낸 사례이지만 사실 트라우마라는 것은 정말 어렵다. 참 주관적이기까지 하면서 똑같은 문제 상황이 있을 때 1의 힘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00의 힘으로도 버거운 사람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1000의 힘으로도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나약한 사람은 아니다. 사람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마음속 상처가 다르기 때문이다.     


  통증의 종류 중 환상통이라고 있다. 환상통(phantom pain)은 헛통증이라고도 하며 신체의 일부가 존재하지 않거나 뇌가 더 이상 자극에 대한 신호를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느끼게 되는 고통으로 일종의 신경적 고통이다. 절단 환자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으로, 한 연구는 절단술 이후 8일 만에 환상통이 시작되었으며 72%의 절단 환자가 이러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혔다. 6개월이 지나도 65%의 환자가 계속해서 환상통을 겪었다. 환상통은 쏘는 듯한 느낌, 으스러짐, 타는 느낌, 경련이 이는 느낌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고통이 오랜 기간 지속될 경우에는 신체의 온전한 부분이 자극에 민감해질 수 있어, 만지는 것만으로도 환상통을 유발하며 배뇨나 배변을 유발할 수도 있다. 신경이나 절단 부위 인근의 민감한 부분에 국소 마취제를 투여함으로써 며칠, 몇 주로부터 영구적으로까지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으나 이는 마취제의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에 한해서만 가능하다.     


  이제 보니 마음에도 환상통이 있는 것 같다. 막 그렇게 아파할 이유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아파온다. 흉터를 보기만 해도 그때의 아팠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치유되지 않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들은 흉터가 이미 흉터가 되어버려 자꾸만 환상통을 불러일으킨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통증을 느끼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한 없이 작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나’라는 사람이 작게 느껴질 때면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인가?’ ‘내가 사라지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갈까? 아무 변화도 없겠지?’라는 생각들이 든다. ‘나의 ‘무쓸모’보다 공장 기계의 어떤 부품이라도 되는 것이 낫지.‘ 싶기도 하다.

      

  생각하기 싫어 애써 얼려놓은 기억들은 잠깐의 방심을 틈타 스며드는 따뜻함을 만나면 완벽하게 녹아 내 앞에 물이 되어 찰랑거린다. 마음이 아주 힘들 때 "너는 다 해도 돼. 다른 사람 다 걱정해도 네 걱정은 안돼. 이유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진심이야."라는 친구의 말에 펑펑 울어버린 적이 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정체모를 무엇이 일으키는 환상통은 그렇게 꽁꽁 얼려져 있다가 따뜻한 말 한마디에 녹아 진통제를 맞는다.     


  어릴 적 학교에서 과학의 날 행사로 과학 상상화 그리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내가 그린 그림은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 지구가 결국 누군가의 장난감이라는 주제로 그린 것이었다. 끝없는 태양계가 누군가의 장난감일 뿐이라면? 우리 한 명 한 명은 가장 얇은 샤프심으로도 찍을 수 없는 작은 존재일 것이다. 그렇게 작은 존재들이 이 험난한 세상에 맞서 싸우는데 당연히 약하다. 운동 경기도 체급에 맞춰 치르는데 우리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체급에 대항하고 있는데 이쯤이면 선방 잘하고 있다.     


  친한 친구가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를 물어왔다. 장난 섞인 말로 내 인생은 너무 쓰다며 아메리카노라고 비유했다. 그는 본인의 인생은 달달하면서 씁쓸하다며 헤이즐넛 아메리카노라고 했다. 어쨌든 우리의 인생이 에스프레소 아닌 게 어디냐며 웃음 지으며 근황 토크는 끝났다. 뭐, 숨겨놓은 비밀까지 들여다보면 모두들 에스프레소일 수도 있다. 에스프레소의 고향 이탈리아에서는 탄산수, 설탕, 크림이랑 먹는다는데. 그럼 그 쓴 맛도 조금은 중화되려나, 아님 쓴맛에 겨우 찾을 수 있는 단맛을 즐길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인생은 어떤 커피일까? 이왕이면 거품 폭신폭신한 카푸치노나 달달한 바닐라라테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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