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무엇> 다비드 칼리 글, 미켈 탕코 그림
갓 태어난 아이를 아낌없는 사랑으로 길러내는 최초의 양육자가 엄마라면 아버지는 때가 되면 엄마로부터 아이를 분리하여 상징계로 이끈다. 아버지의 안내로 아이는 세상에 자기 자리를 마련하고 언어와 법의 질서 안에서 욕망하는 주체로 거듭난다. 그런데 아이 처지에서는 주체가 되는 게 꼭 신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주던 엄마를 잃고 원하는 것을 세상에서 직접 찾아야 한다니,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그 순간이 얼마나 두렵고 고달프겠는가?
세상에는 언어와 법의 시스템이 있고 그걸 적용하는 기준이 있다. 그 기준에 부합해야 타자와 소통할 수 있고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사회적 기준은 최소한의 것만 제시한다. 지킬 것은 지키되 원하는 것은 시스템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라캉이 말하는 ‘상징적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은 그런 사회적 기준점과 비슷하다. 그런데 상징적 아버지가 모든 집의 아이들을 다 상징계로 이끌 수는 없다. ‘나’를 세상으로 안내하는 건 우리 집에 있는 실제로 존재하는 아버지다.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는 ‘상징적 아버지’의 대리자인 셈이다.
그런 배경에서 보면 아이를 이끄는 아버지의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말 그대로 철저히 대리자가 되어야 한다. 자칫 아버지가 스스로 살아있는 법으로 아이에게 군림하면 아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게 되거나 심하면 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림책 <진정한 챔피언>에서 군림하는 아버지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거대한 벽에 수많은 스포츠 영웅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대대로 내려오는 몰레스키 집안의 영웅들이다. 그걸 바라보는 아이, 압틴은 상대적으로 아주 조그맣다. 이미 위축된 모습이다. 초상화 속 영웅들은 한결같이 목에 건 메달을 들어 올리거나 트로피를 높이 쳐들면서 자랑스럽게 손을 흔들고 있다. 모두 화난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고 있는데 입 위쪽에는 작은 점이 있다. 몰레스키 집안의 특징이다.
아버지는 스포츠 챔피언이라는 확실한 목표를 주고 반드시 달성하라고 압틴을 압박했다. 압틴에게 진정한 챔피언이 되어 몰레스키 집안을 빛내야 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조그만 압틴을 짓누를 듯 거대해진다. 아버지는 진정한 챔피언은 어떻게 밥을 먹는지 어떻게 자고 어떤 꿈을 꾸는지 어떻게 걷고 어떻게 강해지는지 주입하고 또 주입했지만 압틴에겐 소용없었다.
압틴은 운동도 잘 못 했고 챔피언이 되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다른 식구들에게는 다 있는 입 위쪽의 점도 없었다. 그는 그림을 좋아하고 야채를 좋아하고 자기 전에 책 읽기를 좋아했으며 밤마다 그림 그리는 꿈을 꾸며 행복해했다.
마침내 아버지는 압틴을 포기한다. “몰레스키 집안에 너 같은 아이가 태어나다니, 조상님들께 용서를 빌어야겠다.”라고 말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포기하는 순간 압틴은 살아났다. 누가 뭐래도 자기는 몰레스키 집안의 일원이고 식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숱한 챔피언을 배출한 운동기구에 앉아 압틴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몰레스키 집안사람들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은 무얼까 하고. 그러고는 결국 자기만의 방식으로 식구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버린다!
스포츠 챔피언을 강요하는 아버지는 압틴에게 살아있는 법이다. 그런데 압틴은 그 아버지에게 압도당하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를 포기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그림으로 ‘진정한 챔피언’을 추구한다. 그럴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모두에게 다 있는 입술 위쪽의 점이 압틴에게만 없다는 건 상징적이다. 압틴만의 고유성, 그것이 압틴이 스스로 행동하는 힘의 원천이었을까?
압틴은 밤새 초상화의 화나 있는 입 모양을 웃는 모습으로 수정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얼굴에도 점을 찍는다. 몰레스키 집안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입술 위쪽의 그 점 말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진정한 챔피언을 추구할 줄 알게 된 압틴이니 굳이 점의 유무로 자기 고유성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물론 웃는 초상화들을 본 아버지는 난리가 났다. 뒷모습만으로도 아버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니까.
압틴은 벽을 가득 메운 초상화를 아버지와는 다른 시선으로 보았다. 아버지는 초상화에서 집안의 대단한 자부심을 읽어 내길 바랐지만 압틴은 수많은 챔피언의 입가에 맺힌 불행을 본 것이다. 압틴은 거기서 진정한 챔피언이란 스포츠라는 정해진 대상이 아니라 무엇이 됐든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아버지의 포기 덕분에 압틴은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참 다행이지 않은가? 아버지가 끝까지 스포츠 챔피언을 고집했다면 압틴은 많이 불행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