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스 알렉사키스, 장-마리 앙트낭 <너 왜 울어?>
인간은 동물 중에서 가장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난다. 스스로 목숨을 지키기까지 제일 오랫동안 엄마(양육자)에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 시작이 그러니 엄마는 아이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갖게 되고 아이는 엄마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 현명한 엄마라면 적절한 시기에 사랑이란 이름의 권력을 내려놓고 아이가 언어와 법의 세상으로 잘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내어줄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현명하지 못하면, 사랑의 탈은 벗어던지고 권력만을 휘두르면 아이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림책 <너 왜 울어?>의 주인공은 이름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냥 아이다.
비행기를 가지고 잘 놀고 있던 아이는 엄마의 ‘코트 입어!’ 한 마디에 장난감을 떨어뜨린다. 늘 욕망하던 외출에 대한 기대감, 자신의 욕망을 꿰뚫어 보는 엄마에 대한 두려움, 늘 그랬듯이 외출 때마다 당하게 되는 닦달에 대한 심란함 그 모든 감정들이 아래로 처박히는 장난감 비행기의 추락에 담겨있다.
알아서 모자를 챙겨 쓰는 아이에게 엄마는 장화부터 찾으라고 성화를 대고 그 순간 아이의 정신은 무너진다. 아이는 허겁지겁 장화를 찾는다. 앞이 뾰족한 양말, 장난감 자동차, 펄럭이는 머플러, 물고기가 그려진 팬티, 그 옆에 같이 구르는 어른 구두, 원피스, 백조 머리 손잡이가 있는 우산.... 커다란 장갑은 마치 엄마의 우악스러운 양손인 듯 그림책의 면 전체를 대각선으로 양분하며 무질서하게 널려있는 온갖 대상들을 압도한다. 하지만 그 많은 물건들 사이에 장화만 없다.
엄마의 최후통첩이 비수처럼 날아온다.
"장화 못 찾으면 엉덩이 한 대 맞고 우리 그냥 집에 있는 거다!"
빨간 모자에 외출에 대한 기대를 담았던 아이는 한없이 작아진다. 아이의 표정에는 엉덩이를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외출을 취소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슬픔이 더 크게 어려 있다.
장화는 아이의 절박감을 비웃듯 작은 유리 어항에서 물에 잠긴 채 발견된다. 아이가 엄마를 벗어나 어디든 갈 수 있다는 희망은 그렇게 물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집요하게 장화를 찾으라 닦달하면서 아이에게, 물에 잠겨있는 희망의 민낯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이가 겨우 얼굴만 간신히 내밀 수 있을 만큼 작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본다. 꼼짝없이 엄마라는 감옥에 갇혀있는 존재이다. 슬픔에 찬 아이의 얼굴에는 한없이 짙은 그늘이 배어있다. 그늘은 밖에서 신나게 웃고 떠들며 노는 아이들에게로 전가된다. 갇혀있는 아이에게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친구들과 신나는 놀이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그래서 아이가 꿈꾸는 세상, 깔깔거리는 아이들과 하늘 높이 솟아오른 공은 비현실적인 그림자일 뿐이다.
간신히 장화를 찾아 신고 밖에 나와서도 아이의 답답함은 풀리지 않는다. 찬바람을 피해 입을 다물어야 했기에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끈 하나도 땅바닥에서 마음대로 주울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는 지렁이를 손바닥 위에 올리자 엄마는 진저리를 치며 버리라고 명령한다. 몸과 마음을 억지로 억압한 결과로 받을 수 있는 것은 고작 슈크림 빵 하나.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의 몸을 휘감고 내려온 스커트의 굵은 창살을 부여잡고. 엄마는 아이의 입은 막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끊임없는 위협의 언어를 내뱉으며 아이를 몰아세웠다. 아이는 타자의 강력한 시선 아래서 꼼짝도 못 하고 얼어붙는다. 자기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타자 앞에 먹이처럼 노출되어있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정상적인 욕망이 작동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마지막에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엄마는 이 상황을 이해 못 한다.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는데 왜 우느냐며 툴툴거린다. 하지만 아이의 울음은 엄마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시작이다. 아이의 눈물은 엄마라는 감옥의 굵은 창살을 녹일 것이고 터져 나온 울음소리는 창살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용기를 줄 것이다. 그나마 아이가 울어서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