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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Jan 27. 2021

거울아,
가장 아름다운 것을 비춰다오

몸으로 다시 쓴 음악 '백설공주'와 '말러'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오로라,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같이 위기에 빠진 공주들, '신데렐라'나 '호두까기 인형'의 마리(클라라)처럼 왕자를 만나 환상을 경험하는 소녀들, 또 '지젤'과 '라 실피드'의 요정 실피드와 같은 비련의 여주인공까지.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라면 모두 발레가 되었건만, 어쩐지 이 공주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것 같다. 오늘은 앙줄랭 프렐조카주의 2008년 안무작 '백설공주(Blanche Neige)'를 소개한다.


가엾은 공주를 시기한 계모의 독사과를 먹고 쓰러져 죽을 뻔했으나 이웃 나라 왕자의 키스 덕분에 깨어난다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을 품은 사랑 이야기. 많은 이들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로 잘 알려진, 독일 그림형제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며 전해진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고전 발레나 오페라 작품 중에서는 '백설공주'를 찾기가 쉽지 않다. (*피셜1: 참고로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1882년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한 '백설공주(The Snow Maiden)'는 동명의 러시아 소설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현대인에게는 와닿지 않는 동화여서일까?


21세기 들어 '백설공주'가 컨템퍼러리 발레 작품으로 관객 앞에 섰다. 감각적인 안무와 도발적인 무대로 주목받는 프랑스 안무가 앙줄랭 프렐조카주의 손에서 재탄생했다. 알바니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에서 발레와 현대무용을 배운 그는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포스트모던댄스를 접하게 된다. 그리곤 여러 문화로부터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무용단 프렐조카주 발레를 설립하는데, 낭만적인 발레 테크닉, 표현주의를 바탕으로 한 섬세하고 감각적인 안무, 공간에 대한 추상적 접근과 독특한 동선 등 무대의 모든 요소가 특유의 스타일을 드러낸다. 언뜻 그의 작품을 보면 '토슈즈도 신지 않았는데 무슨 발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춤이 발레 테크닉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야말로 발레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자유롭게 춤추는 컨템퍼러리 발레인 것이다.



앙줄랭 프렐조카주 '백설공주(Blanche Neige)'


앙줄랭 프렐조카주는 흔히 아는 백설공주 이야기에 자신의 해석과 의미를 더해 ‘어른을 위한 동화’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그전까지 플롯을 거부하며 추상적인 작품에 주력하던 그가 내러티브에 도전한 건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백설공주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기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원작에 등장하는 여러 상징에 자신만의 해석을 가미했다. 여기에 오트 쿠튀르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오가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가 만든 의상이 이야기에 내포된 에로틱하고 잔혹한 느낌을 한껏 살렸다.(*피셜2: 장 폴 고티에를 모른다면 마돈나의 콘 브라, 영화 '제5원소' 속 기괴하고 신비로운 의상들을 떠올려 보시길) 이미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인지 이렇게 완성된 시각적 매혹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독보적인 안무가와 패션 디자이너의 만남, 여기에 정점을 찍은 건 바로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이다. 이미 1994년 '공원(Le Parc)'이라는 작품에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선곡해 사랑의 여러 얼굴을 보여준 바 있는 프렐조카주는 음악적 어려움을 예상하면서도 과감히 말러를 선택했다. 사실 말러의 곡은 춤을 추기엔 어쩐지 잘 맞지 않을 것 같은 음악이다. 지금에야 말러의 음악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국내에서는 ‘어려운 음악’으로 통용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세기말의 음울하고도 묘한 분위기가 깃든 그의 음악은 프렐조카주의 작품으로 새롭게 거듭난다. 기승전결의 흐름을 가진 교향곡의 특성은 장면을 극적으로 만드는 데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존 노이마이어가 '카멜리아의 여인'에서 쇼팽의 음악을 원곡 그대로 사용한 것과 달리(*지난 호 참고), 프렐조카주는 단 한 장면만을 제외하고는 말러의 교향곡을 세밀하게 분해한 뒤 재조합해 전체를 구성했다. ‘말러 마니아’가 아니고는 어떻게 엮은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거기에 전자음악 그룹 '79D'가 적재적소에 사운드 디자인을 더 했다. 그렇게 어른들을 위한 발레 '백설공주'가 탄생했다.


공주의 성인식을 축하하기 위한 춤이 벌어지는 장면에선 교향곡 2번이 연주된다.(*피셜3: 말러의 교향곡 2번은 경매 역사상 가장 비싸게 낙찰된 친필 악보이다.) 죽음을 생각하며 쓴 1악장과 대비되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2악장이 바로 이 부분을 장식하는데, 단정하게 늘어선 무용수들의 경쾌한 움직임이 음악과 맞아 들며 앞으로의 장면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킨다.



코리안심포니 말러 교향곡 제2번 '부활' (지휘 임헌정, 소프라노 황수미, 메조소프라노 양송미)


백설공주와 왕자는 총 세 번의 파드되를 추는데, 이때 선곡된 음악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다. 두 사람이 첫눈에 반한 장면에서는 교향곡 4번 3악장, 잠든 공주를 깨우는 춤에서는 5번 4악장, 마지막 결혼식 파드되에서는 3번 3악장이 울려 퍼진다. 음악의 흐름을 타고 상대와 부드럽게 대화하는 듯한 움직임은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든다. 천천히 날아오르듯 상대를 들어 올려 동화적 풍경을 만든다거나 아이가 장난치는 듯한 동작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계모가 등장할 때는 극한의 온도차를 보여준다. 골반을 극도로 흔들거나 다리를 높게 올리고, 공주의 입에 독사과를 쑤셔 넣는 장면은 공주의 '선'에 맞서는 '악'의 이미지를 강조한다.(*피셜4: 이 장면에 등장하는 백설공주의 화이트 드레스와 왕비의 블랙 드레스는 상당히 파격적이다. 이건 꼭 봐야 해!)


7번을 제외한 말러의 모든 교향곡이 백설공주 이야기 속에 녹아들었으니 그 편집본을 보고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를 꼽자면 깨어난 백설공주와 왕자가 함께 추는 파드되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의 위기에서 결혼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이 장면에서는 교향곡 5번 가운데 4악장 ‘아다지에토’가 사용되었다.(*피셜5: 말러는 알마 신들러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이 곡을 선물해 그녀의 마음을 얻어냈다. 재능 유혹의 올바른 예) 이 곡의 느리면서도 깊은 선율은 왕자가 구해주는 순간을 그저 기다리는 공주가 아니라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의 역경을 딛고 진정한 사랑을 깨달아간다는 점을 부각하고 싶은 안무가의 의도를 뒷받침해준다. 또한, 처음 만난 일곱 난쟁이와 마음을 터놓고 어울리는 장면의 3번 3악장은 결혼식에서도 사용되는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도록 도와준 이들을 상기하게 하려는 의도였을까 싶어 미소를 짓게 된다.



앙줄랭 프렐조카주 '백설공주(Blanche Neige)' 18장 말러 교향곡 제5번 4악장 아다지에토



앙줄랭 프렐조카주 발레 <백설공주> 음악 목록

1장 | 말러 교향곡 2번 5악장

2장 | 말러 교향곡 2번 2악장

3장 | 말러 교향곡 9번 2악장

4장 | 말러 교향곡 10번 1악장, 5번 2악장

6장 | 말러 교향곡 10번 3악장

7장 | 말러 교향곡 5번 3악장

8장 | 말러 교향곡 4번 3악장

9장 | 말러 교향곡 6번 4악장

10장 | 말러 교향곡 6번 2악장, 2번 5악장

12장 | 말러 교향곡 1번 3악장

13장 | 말러 교향곡 1번, 2번

14장 | 말러 교향곡 3번 2부 3악장

15장 | 말러 교향곡 8번 2악장

16장 | 말러 교향곡 9번 4악장

18장 |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19장 | 말러 교향곡 3번 2부 3악장



글쓴이 김태희 (공연칼럼니스트)

공연예술을 글로 엮어내는 일을 한다. 회사의 파티션에서 벗어난 뒤 정한 직함은 ‘에디터’지만, ‘태희 씨’부터 ‘평론가’ ‘편집장’까지 당신이 원하는 무엇으로든 불린다. 발레에서 출발해 춤 전반과 클래식 음악을 거쳐 전통예술, 연극까지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웹이 익숙하고 편하지만 손에 쥐어지는 책만큼 아름다운 기록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감의 동반자는 매콤달달한 떡볶이와 커피, 그리고 악보까지 외워버린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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