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다시 쓴 음악 '카멜리아의 여인'과 '쇼팽'
흔히 발레는 ‘가장 우아한 춤’이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조의 호수’ 대신 이 작품을 추천한다. 존 노이마이어의 1978년 안무작 ‘카멜리아의 여인(La Dame aux Camélias)’.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동명 소설이자 연극·오페라 등으로 변주되며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 ‘춘희’ 혹은 ‘동백 아가씨’를 바탕으로 한 발레 작품이다. 오페라로는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가 대표적이다. 발레 ‘카멜리아의 여인’은 뒤마 피스의 소설을 3막 발레로 구성해, 당시 프랑스 화류계의 분위기를 한껏 살린 작품이다. 존 노이마이어의 이 걸작은 20세기에 탄생한 최고의 '드라마 발레'라 부를 만한데, 그 핵심에는 쇼팽의 음악이 있다.
안무가가 처음 슈트트가르트 발레에서 함께 활동한 마르시아 하이데에게 헌정할 작품으로 이 소설을 선택했을 때 염두에 둔 음악은 모두의 예상처럼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였다. 그다음에 떠올린 건 앙리 소게의 1957년 작 ‘카멜리아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두 악보 모두 이야기 구조를 토대로 만들어졌음에도 어쩐지 그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질 않았다. 그러다 친분이 있던 지휘자 게르하르트 마크슨과 대화하던 중 떠올린 것이 바로, 쇼팽의 음악이었다. 그의 음악이라면 소설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마리 뒤플레시스가 살았던 1840년대 파리 문화를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같은 시기 파리에서 그도 사랑에 빠져있었으므로.
탁월한 음악성에, 춤과 음악이 대화하듯 어우러지는 연출을 보여주는 존 노이마이어는 그렇게 낭만발레를 뛰어넘는 로맨티시즘을 만들어낸다. 쇼팽의 수많은 피아노 음악은 언뜻 춤을 추기에 가장 좋은 음악으로 느껴지지만, 그 자체로 완전한 작품이기에 실제로 안무를 덧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점은 노이마이어에게도 많은 고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전 정보 없이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놀랍게도 마치 모든 음악이 안무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완벽에 가까운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작품은 마르그리트의 유품 경매를 준비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내용은 뒤마 피스의 실제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무대 한편에 놓인 피아노에 앉은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곡이 피아노 소나타 3번 3악장 ‘라르고’이다. 이 곡은 쇼팽이 자신의 연인 조르주 상드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쓴 작품이다. 아버지를 여의고 자신의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도 연인의 따뜻한 사랑과 간호를 받으며 이 곡을 완성했다. 극도의 슬픔과 극강의 사랑 속에 놓인 그가 쓴 이 작품에 대해 평론가 니크스는 "꿈을 꾸는 듯하다", "작곡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공상에 가깝다"고 표현했다. <카멜리아의 여인>에서도 이 곡은 많은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곡은 작품을 여는 프롤로그와 2막 파드되, 3막 마지막 장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같은 곡일지라도 장면에 따라, 춤에 따라, 주인공의 감정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느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없이 비극적이다가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는 듯 무한히 사랑스럽다.
1막에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전 악장이 사용된다. 작곡가와 그의 작품을 존중하기 위해 원곡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이외에도 작품 연출을 위해 피아노 음악을 관현악 편성으로 바꾸는 편집을 하지 않고, 모든 음악을 원형 그대로 가능한 존중한 것이 돋보인다. 다만 춤을 위해 연주의 빠르기와 강약은 상황에 따라 바뀌는데, 이 섬세한 ‘조정’ 과정에서 이야기 전체의 감정선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조금 빠르고, 때로는 과하게 느린 연주를 통해 춤선은 물론 감정선이 함께 만들어진다. 마르그리트와 아르망, 두 사람이 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1막 파드되에선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 ‘라르게토’가 흘러나온다. 실제로 이 곡은 19살의 쇼팽이 겪은 뜨거운 첫사랑의 감정이 담긴 곡이다. 그는 처음 겪는 낯설고 순수한 감정을 피아노 위에 펼쳐놓았다. 그래서일까. 한껏 팔다리를 뻗어 서로를 향한 벅찬 감정을 표현하는 동작들 뒤로 흐르는 잔잔하고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이 이들의 순수한 사랑을 더욱 빛나게 한다. 자유로운 듯하면서도 박자에 꼭 맞도록 쪼갠 동작들은, 이 안무가가 얼마나 뛰어난 음악성을 기반으로 춤을 만드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사랑의 한때를 그린 2막으로 넘어가면 다채로운 왈츠·폴로네즈·야상곡·전주곡이 무대를 채운다. 음악이 변화하듯, 무대의 분위기도 전환된다. 아르망의 아버지에게 교제 사실이 발각된 뒤 추는 파드되에선 프롤로그에 등장한 ‘라르고’가 반복된다. 굳이 화려하고 멋진 동작이 아니더라도, 두 사람이 손을 맞잡거나 고개를 돌려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아마도 그건 음악의 힘 덕분이 아닐까 싶다.
대사 한 줄 없이도 사랑과 이별을 표현하는 만 가지 감정이 따라 흐르는 음악, 그 위에 걸쳐진 한없이 우아한 춤들은 관객의 심금을 ‘톡’하고 건드린다. 존 노이마이어의 '카멜리아의 여인'을 볼 때마다 무대로부터 밀려오는 감정들에 글썽일 수밖에 없었던 건 아무래도 작곡가와 안무가의 합동 작전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존 노이마이어의 발레 ‘카멜리아의 여인’ 속 쇼팽 음악 목록
프롤로그
피아노 소나타 3번 3악장 Op.58
1막
피아노 협주곡 2번 Op.21
2막
화려한 대왈츠 1번 Op.34
세 개의 에코세즈 Op.72
화려한 대왈츠 3번 Op.34
피아노 소나타 3번 3악장 Op.58
프렐류드 2번, 15번, 17번, 24번 Op.28
3막
폴란드 노래에 의한 환상곡 Op.13
발라드 1번 Op.23
화려한 대폴로네즈 Op.22
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 Op.11
피아노 소나타 3번 3악장 Op.58
글쓴이 김태희 (공연칼럼니스트)
공연예술을 글로 엮어내는 일을 한다. 회사의 파티션에서 벗어난 뒤 정한 직함은 ‘에디터’지만, ‘태희 씨’부터 ‘평론가’ ‘편집장’까지 당신이 원하는 무엇으로든 불린다. 발레에서 출발해 춤 전반과 클래식 음악을 거쳐 전통예술, 연극까지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웹이 익숙하고 편하지만 손에 쥐어지는 책만큼 아름다운 기록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감의 동반자는 매콤달달한 떡볶이와 커피, 그리고 악보까지 외워버린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