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다시 쓴 음악 '멀티플리시티'와 '바흐'
기분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음악이 있다. 내게는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그런 곡이다. 정교하게 변주된 멜로디는 우울한 날이면 한없이 음울하게, 기분이 좋은 날에는 한껏 명랑하게 느껴진다. 독특한 허밍이 더해진 글렌 굴드의 음반이라면 그런 감상이 더욱 짙어진다. 주로 피아노 한 대로 연주되는 이곡이 무한히 웅장하게 느껴진 경험도 있다. 바로, 지금 소개할 작품이 그러하다.
2014년 당시 창단 30주년을 맞이한 유니버설발레단이 무대에 올려 국내 관객에게도 잘 알려진 ‘멀티플리시티’. 안무가 나초 두아토에게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의 영광을 안겨주고 세계적인 안무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구름판 역할을 해준 작품이다. 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그런 찬사가 뒤따르는 것일까. 스페인 태생으로 모리스 베자르의 루드라 무용학교를 졸업하고 앨빈 에일리 댄스 시어터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력만 보면, 그가 바흐의 음악을 선곡했다는 것에 의아함이 먼저 들지도 모른다.(*피셜 1: 모리스 베자르는 '볼레로', '퀸'의 노래를 배경으로 한 '삶을 위한 발레' 등 무려 260여 편의 작품을 만들었고, 앨빈 에일리는 재즈, 탭댄스, 발레와 뮤지컬, 록 등의 장르를 오가며 대중적 작품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전적과 달리 그는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NDT)로 자리를 옮겨 예술감독 이르지 킬리안을 만나면서 비로소 자신만의 안무 스타일을 정립하게 된다. 움직임에 감정을 녹이고, 음악과 드라마를 구성하는데 중점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1999년,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서거 주기를 맞아 바이마르에서 안무가 나초 두아토에게 작품 한 편을 의뢰한다. 바흐가 몇 년간 궁정 음악가로 있던, 교회음악에 열중한 그에게 충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 도시는 음악가를 조금 특별하게 기억하고자 한 것이리라. 한번도 바흐의 음악으로 춤을 만들어 본 적이 없던 안무가는 고민에 빠진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자체로 위대한 음악으로 춤을 만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도전해 성공을 이뤄낸다. 토슈즈를 벗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우아하게 발현했고, 현대적 구상은 세련된 미감을 선사했다. 자신의 세속적인 손으로 성스러운 음악을 건드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 안무가는 레퀴엠과 미사곡같이 잘 알려진 교회음악을 피해 칸타타와 기악곡을 선택한다. 그렇게 장면마다 절묘하게 배치된 바흐의 음악이 비로소 작품을 완성시킨다.
1부는 바흐가 살았던 세기 시대적 배경부터 음악가로서의 그의 삶과 창작과정을 풀어낸다.(*피셜 2: 1부에서는 동작, 표정이나 의상, 색상 등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들이 많이 등장한다.) ‘멀티플리시티’의 첫 장면은 창작 과정에서의 고민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음악가로부터 무용작품의 창작을 허락받는 안무가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윽고 무대가 환하게 밝혀지며 세속 칸타타 205번 ‘만족한 에울로스’가 울려 퍼진다. 오케스트라의 악기와 연주자, 오선보에 그려진 음표를 상징하는 무용수들이 나란히 늘어서서 바흐를 대변하는 지휘자의 손놀림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객석에 앉아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감탄사와 공연 중에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내적 갈등에 사로잡히게 된다. 음악과 춤이 하나를 이루며 경외감을 일으킨다고 해야 할까. 무용수 18명이 이뤄낸 역동적인 군무가 끝나면, 작품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바흐와 첼로 듀엣이 펼쳐진다. 활을 든 음악가와 첼로로 형상화된 여성 무용수의 움직임, 무용수의 몸 여기저기를 활로 그어가며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하는 모습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서 에로틱한 감상을 자아낸다.
이 작품의 원제는 ‘멀티플리시티. 침묵과 공의 형상(Multiplicity. emptiness)’이다. 바흐의 음악에 맞춰 있는 힘껏 춤을 펼친 1부가 ‘멀티플리시티(다양성)’라면, 음악가 말년을 반추한 2부는 ‘침묵과 공의 형상’을 대변한다. 급격히 쇠약해지며 시력을 잃고, 병으로 생을 마친 음악가의 마지막을 조심스럽게 뒤따라간다. 남성 무용수들의 비장한 군무와 무대를 가르는 점프는 당시 그가 느꼈을 고통을 절절하게 표현한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아름다움은 극한에 이른다.
작품의 마지막, 무대 뒤편에 설치된 구조물 위로 무용수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무대를 열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다시 잔잔하게 연주된다.(*피셜 3: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전곡이 약분에 달하는 긴 연주곡이자 30개의 변주가 어우러진 작품이다. 헤르만 카를 폰 카이저링크 백작이 불면증 치료를 위해 바흐에게 의뢰한 곡이기도 하다. 어쩌면 바흐의 죽음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마지막 씬에 '영면을 청하는 영혼'이라는 심오한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었을까.) 오선보를 표현한 듯한 층계 위로 무용수들이 모두 오르는 순간, 막이 내린다. 마치 잠시 찬란하게 춤춘 음표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안무가는 이 작품에 푸가의 기법을 선곡하면서 미완성의 형태를 그대로 존중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화려한 시작부터 장엄한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음악가를 향한 안무가의 경외심이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나초 두아토의 ‘멀티플리시티’ 음악 목록
프롤로그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
1부
세속 칸타타 205번 BWV 205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BWV 1007
음악의 헌정 BWV 1079
관현악 모음곡 2번 BWV 1067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번 BWV 1048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BWV 1023
네 대의 쳄발로를 위한 협주곡 a단조 BWV 1065
하프시코드 협주곡 5번 BWV 1056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 BWV 1043
칸타타 BWV 115
결혼 칸타타 BWV 202
바이올린 소나타 5번 BWV 1018
2부
푸가의 기법 BWV 1080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 538
오르간 트리오 소나타 BWV 530
칸타타 BWV 156
칸타타 BWV 21
푸가의 기법 BWV 1080
기타 참고 영상
사진제공 : 유니버설발레단
글쓴이 김태희 (공연칼럼니스트)
공연예술을 글로 엮어내는 일을 한다. 회사의 파티션에서 벗어난 뒤 정한 직함은 ‘에디터’지만, ‘태희 씨’부터 ‘평론가’ ‘편집장’까지 당신이 원하는 무엇으로든 불린다. 발레에서 출발해 춤 전반과 클래식 음악을 거쳐 전통예술, 연극까지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웹이 익숙하고 편하지만 손에 쥐어지는 책만큼 아름다운 기록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감의 동반자는 매콤 달달한 떡볶이와 커피, 그리고 악보까지 외워버린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