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마지막 연주를 끝낸 뒤, 노이브란덴부르크에서
안녕하세요. 한결입니다. 10월은 정말 정신없이 보냈어요. 지난 3주간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도르트문트 필하모닉, 틈틈이 노이브란덴부르크를 왔다 갔다 하며 제 오케스트라와 5번의 가족연주회, 1번의 정기연주회, 1번의 오페라 연주를 했어요. 방금 10월의 마지막 연주를 끝내고 몰려드는 피곤함에 연주장 뒷문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가을볕 밑에 앉아 문득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지휘자로서 일을 시작한 지 벌써 1년 반이 흘렀어요. 학생 시절에는 저를 알아주는 곳도, 찾아주는 곳도 없었는데... 제 음악을 들려드릴 기회가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죠. 아직은 어떤 대상을 향한 음악보다는 저 자신을 향한 확신과 증명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보다 지휘자로서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주어진 자리에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저는 작년부터 노이브란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트라에서 카펠마이스터로 일하고 있어요. 카펠마이스터는 독일어로 '악장'이라는 뜻으로 보통 수석지휘자 또는 상주지휘자를 말해요. 노이브란덴부르크는 베를린 근교에 있는 도시인데, 자연 친화적인 메클렌부르크 주 다른 도시와는 달리 비교적 현대식 건물이 많아요. 지금 여긴 완연한 가을이고, 날씨는 서울보다는 쌀쌀할 거예요. 날이 추워지니 문득 봄이 찾아오던 작년 4월이 생각이 나네요.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고 싶어 열심히 오디션을 다니던 때지요. '하나만 걸려라'하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지원했죠. 현재 제가 소속되어있는 노이브란덴부르크 필하모닉, 독일 지휘자 포럼(Dirigentenforum), 그리고 피터 외트뵈시 재단 멘토링 프로그램의 작곡가 및 지휘자 오디션 등 각기 다른 7번의 오디션들이 한꺼번에 몰려있었어요. 하필 단 하루도 겹치지 않아 2주 동안 여러 도시를 종횡무진으로 이동했어요. 준비할 것도 많고 일정도 아슬아슬하게 붙어있어서 정말 한두 개는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일정이었죠. 마지막 오디션이었던 노이브란덴부르크 카펠마이스터 오디션 2차에는 제 순서 5분 전에 도착했는데, 조금만 더 늦었다면 지금의 저와 다른 삶을 살았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많은 행운이 있었으리라 믿고 있어요. 이 편지에 행운을 담아 보냅니다.
제가 매일 혼자 주문처럼 되뇌는 단어가 있어요. '지휘자의 삶'... 집이 없는 사람처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처럼 살아가야 하는 그런 삶. 뮌헨 음대에서 교수님들이 "나중엔 더 힘드니 지금은 겪어봐야 한다", "어차피 지휘자가 되면 매일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체력'은 필수더군요. 좋은 음악은 좋은 에너지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걸 실감하고 있어요.
'체력'이라는 단어를 써놓고 보니 작년 7~8월 그슈타드 메누힌 페스티벌 & 아카데미 지휘 콩쿠르가 생각납니다. 이 대회는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마스터클래스 형식으로 진행되다가 마지막 2주간 11명이 서로 네메예르비 상을 놓고 경쟁하는 시스템이에요. 처음 놀랐던 지점은 지휘를 잘하는 젊은 친구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런데 3주간 매일 다른 곡의 리허설과 연주를 반복하면서 점차 극명하게 갈리더군요. 2주차부터는 참가자들이 안 하던 실수를 하고 준비가 덜 된 느낌을 주기도 했죠. 무려 16곡을 지휘해야 하니 당연히 쉽지 않았어요. 이때부터는 실력이 아니라 체력과 정신력으로 버텨야만 했어요.
함께 고생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앞에서 힘든 내색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어요. 하루하루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제가 선택한 기쁨으로서의 '지휘자의 삶'을 주문처럼 외웠어요. 다행히 좋은 결과를 얻었어요. 시상식이 끝나고 마지막 날에는 우연히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나기도 했고요. 그 친구는 페스티벌 폐막연주 협연자로 왔는데, 예상치 못한 만남에 둘 다 정말 기뻐했었죠.
제게는 지난 1년이 '벌써' 1년, '무려' 1년의 세월이지만, 인생을 생각할 때는 아주 작은 점들이길 바라요. 전 아직 젊고, 힘든 일보다는 즐거운 것들이 많습니다. 오늘을 한창 좋을 때라 여기고 싶어요. 틈틈이 정신이 들면(?) 작곡도 하고 있고요. 아! 언젠가 제가 만든 곡을 들려드릴 수 있다면 좋겠네요.
글쓴이 윤한결 (지휘자이자 작곡가 그리고 피아니스트)
지휘도하고 곡도 쓰고 피아노도 친다. 웃기게도 음악을 제외한 다른 취미엔 실력이 늘고 경쟁해서 이기는 걸 좋아하는 파이터 성향을 지녔다. 어린 나이에 독일 유학을 선택한 이유는 명료하다. "종일 축구와 음악만 하고 싶어서"
월클 Say
막연히 음악가, 예술가라고 하면 왠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곤했어요. 적어도 저에게는요. '그들의 일상은 나와 다를까?'란 사소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이 코너는 음악가의 속사정을 훔쳐보고 싶은 마음에 꾸려봤어요.
윤한결 is
월클이 첫 번째 주목한 음악가는 지휘자 윤한결입니다. 지휘자로서 윤한결은 2015년과 2017년 하이덴하임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음악 어시스턴트로 활동하였고, 2017/18 시즌 뉘른베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는 마르쿠스 보쉬 교수의 부지휘자, 2018/19 시즌 제네바 대극장의 오프닝 프로덕션에서는 게오르그 프릿치 교수의 부지휘자로 활동했어요. 그는 독일음악협회 지휘자 포럼의 장학생이자 2019/20 시즌부터는 노이쉬트렐리츠/노이브란덴부르크의 메클렌부르크 주립극장의 제2카펠마이스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9년 8월 250명이 참가한 그슈타드 메뉴힌 페스티벌 & 아카데미에서 11명의 결선 진출자 가운데 당당히 지휘 부문의 1등상인 네메 예르비 상을 거머쥔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지휘자죠.
또한, 작곡가로서 윤한결은 2019년 11월부터 부다페스트의 페테르 외트뵈시 재단의 위촉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그의 차기 작품은 향후 2년 내에 페테르 외트뵈시의 멘토링 프로그램에서 초연될 예정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