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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강산 May 21. 2023

쉽게 쓰인 글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어느 송년회 자리였다. 윤동주의 서시가 건배사로 나왔다. 공직에서 퇴임을 앞둔 선배님이었다. 전반적으로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난데없는 시 낭독이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얼마 못 가 코끝이 찡해졌다. 울컥했다. 특히,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부분이 송곳처럼 찔렀다. 계속 맴돌았다.


왜 그랬을까. 짧은 생이지만 부끄러운 날이 많아서일까.


세상의 기준에서, 나는 문제아였다. 남들은 출석만 하면 3년 만에 받는 고교 졸업장을 5년 만에 받았다. 내 생활기록부에는 내신성적 9등급과 무단결석 수십 회의 기록이 있다.


다시 세상의 기준에서, 나는 성공한 청년이 되었다. 스물일곱, 서울대학교 석사과정 재학 중 최연소 서울시의원이 되었다. 사회적 명성과 각종 의전, 상당한 보수가 뒤따른다.


이러한 나의 서사를 보통 개인적 측면에서 개과천선했다고 평가한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표현한다. 둘 다 잘못된 진단이다. 세상에 빚을 졌을 뿐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움찔하는 까닭이다. 부채감이 크다.


윤동주는 스물일곱, 타국의 차가운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이라는 슬픈 천명을 일찍 마감했다. 같은 나이에 나는 공직에 입문했다. 또 다른 천명이다. 생각이 많아진다.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이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어진 시. 제목은 쉽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시대의 어려움과 저항의 어려움, 개인의 어려움이 한데 녹아있다. 창밖의 밤비와 아름다운 선율은 조용히 거들 뿐이다.


어려움에 더해 부끄러움도 녹아있다. 경계인의 부끄러움이다. 식민지 조선과 일본 제국의 경계, 지식인과 혁명가의 경계,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윤동주는 늘 부끄러워했다.


나 또한 부끄러움을 글에 녹인다. 짧은 생이지만 줄곧 경계인이었다. 선과 악, 주류와 비주류, 제도권과 운동권의 경계 어딘가, 회색지대에 살았다. 지금도 그곳에 있다.


윤동주의 시대와는 다른 오늘이지만, 부끄러움의 깊이는 같다. 짧은 생이지만, 어려운 날이 많았다. 그에 비하면 나의 글은 쉽게 쓰인다. 쉽게 쓰였고, 쉽게 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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