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마케팅
겨울이 오자 탑골 공원에도 차갑고 시린 냉기가 내렸다. 바둑과 장기로 소일하던 노인들도 사라졌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낙원상가 쪽으로 늘어선 순대국집도 썰렁하긴 매한가지였다. 이들은 하루 만 원 남짓한 돈으로 담배를 사피우고 술추렴을 하며 이 곳 어디쯤에서 하루를 보낸다. 추레한 옷차림의 노인들은 살아생전 송해 씨가 다녔다는 이발관 옆 골목 어귀에서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종로로 나가는 좁은 골목에 영역 표시하듯 노상 방뇨를 했다. 주위에 듬성듬성 붙어있는 해장국집은 새마을운동에 동참하자는 노래가 흘러나오던 시절부터 공부하는 학생과 쓰레기 치우는 미화원의 헐거운 빈속을 토렴한 국물로 따스하게 데워주던 곳이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어 시래기국과 밥 한 공기, 짠지 한 종지가 나오는 식사가 2500원이다.
한편 버스가 오가는 대로변을 건너 종로 3가 빌딩 쪽으로 가면 조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국일관 건물 6층 세종당구장은 오후가 되면 어느 정도 차려 입은 노인들이 속속 몰려든다. 넓직한 공간에 서른 개 가까운 당구대가 놓여 있고 당구대 점수판 옆에 전화 충전기도 기종 별로 준비돼 있다. 노인들은 저녁 술추렴에 앞서 두 세 시간을 이 곳에서 당구를 치며 보내는데 내기에서 이기면 짜장면은 공짜다. 이어지는 뒤풀이에서 눈치껏 서로 벌충을 해서 한 달을 셈하면 추렴의 결과가 비슷하다. 노인들의 무료함을 달래 주고 친교를 나누는 공간은 주위에 몇 곳이 더 있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옆 2층의 작은 카페 ‘섬’은 맥주와 위스키를 팔고 통기타도 한 대 갖춰 놓았다. 늦은 시간 샐러리맨들이 몰려와 2차 취기를 풀어놓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 한가락 했을 멋진 노신사가 세월 담은 목소리로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열창하기도 한다. 청량리역 과일시장에서 경동시장 쪽으로 가다보면 전자오락실처럼 울긋불긋한 벽지를 두른 상가건물 1층에선 지루박 박자의 흥겨운 아코디온 연주가 흘러나왔다. 안에서 초로의 남녀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의 몸을 밀고 당기며 리듬을 타고 있었다. 추운 날이었지만 홀 안에는 노인들로 빼곡했다. 광화문과 종로와 청량리 주변에 이리저리 분포된 노인들의 공간은 썰물에 밀려난 쪽배처럼 그늘져서 처량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올 해 상반기 새 차 등록 증가율이 가장 높았던 연령대는 놀랍게도 60대 이상의 고령층이다. 60세는 환갑이 아니라 일자리를 준비하는 나이가 되었다. 노인들은 72.3세가 돼서야 일손을 놓겠다고 대답했다.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고 취향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노인들이 생업 전선에 뛰어들고 있다. 일하는 노인들이 시장통 귀퉁이에 쭈그려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신세 한탄으로 시간을 때울 것이란 생각은 시대착오적이다.
코로나는 새로운 60대(New Sixty)의 등장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많은 노인들이 가끔 집에 들른 손주들에게 배워 배달앱을 깔아 썼다. 써보니 편리했다. 유투브도 마찬가지였다. 노인들의 관심사는 그들의 인생만큼이나 폭이 넓다. 바둑과 장기뿐 아니라 주식이나 집 값의 등락을 확인하고 정치적 동지들을 찾아 댓글로 의견을 주고 받는다.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인구가 증가 중인 유일한 연령대다. 재미있는 컨텐츠를 찾는 도파밍(Dopaming)이나 선호하는 인플루언서를 따라 소비하는 디토소비(Ditto Consumption)의 요즘 트렌드도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곧 반영될 것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Old & New)이 뒤섞인 힙한 공간을 찾으려는 욕구도 마찬가지다.
사실 광장시장 좌판에 자리를 깔고 앉아 순대국과 김치전에 막걸리를 마시며 사진을 찍어 올리는 부류는 오히려 주머니 사정이 얄팍한 젊은이들이다. 조금은 더 격조 있고 품위 있는 공간은 성숙한 인생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노년에게 더 필요할지 모른다. 적당한 가격과 깔끔한 분위기에 노년의 기품이 스며든 살롱 같은 식당과 술집 같은 곳 말이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했다. 환갑으로 접어든 내 스스로 깃발을 들고 세를 규합해서 실행에 옮겨볼지 목하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