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을 먹는 시간

by 강상록

베이글을 파는 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당근 라페, 치즈, 햄이 들어간 베이글 샌드위치와 아이스 라테. 베이글 사이로 당근이 아주 많이 들어있어 빵이 힘겹게 입을 벌리고 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당근이 많다. 샌드위치에서 빠져나온 당근 몇 개를 포크로 찍어 먹어본다. 새콤하면서도 짭조름하고 달짝지근한 것이 완벽하게 조화롭다. 그냥 생당근을 채 썰어 놓은 듯 생겼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맛이 난다. 생당근을 먹을 때 나는 특유의 향, 흙을 먹으면 이런 맛이지 않을까 싶은 그런 향은 나지 않는다. 당근 라페를 검색해 본다. 올리브유, 소금, 레몬즙, 꿀이나 설탕으로 절인 음식이라고 한다. 프랑스 음식이라고 나온다. 프랑스 음식이 궁금해지게 만드는 맛이다. 고작 당근인데! 샌드위치에서부터 흘러나온 당근을 한 조각도 빠짐없이 모두 먹었다. 당근을 이렇게 맛있게 먹었던 적이 있던가. 어릴 때 열무김치에 들어간 당근을 골라먹던 일이 생각난다. 김치의 맛을 잘 몰라서 그랬는지 김치에 들어간 당근을 좋아했다. 열무김치에서 색감을 맞추는 용도로나 쓰였을 법한 몇 개 안 되는 당근을 쏙쏙 골라 먹었다. 시원한 맛 때문이었을까, 오도독 씹히는 식감 때문이었을까. 어린이만 아는 당근의 매력이 있었던 걸까. 열무김치 무더기에서 당근을 찾는 게 재미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있는 시간이 뇌를 쉬게 한다고 들었다. 흔히 말하는 '멍 때리는 시간', 생각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시간이다. 모든 일을 마치고 저녁에 거실에 누웠을 때, '아 이제 좀 쉬어볼까'하고 유튜브를 시청하고 SNS 화면을 넘기곤 하는데 이건 진정한 휴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뇌를 쉬게 한다는 말이 좋아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실천 중이다. 밥을 먹으며 유튜브를 보는 대신 당근을 뒤적거리고 맛과 조화를 음미하며 프랑스를 생각하는 이유다. 이리저리 생각 사이를 오가다 보면 현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먼 과거가 갑자기 생각나기도 하고,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은 미래가 떠오르기도 한다. 밖에서는 생각을 자유롭게 하고(휴대폰을 보지 않고) 길을 걷는다. 그러다 보면 길에 피어있는 꽃의 이름을 궁금해하고, 지나가는 고양이와 대화를 시도한다. 날씨가 좋으니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무슨 운동을 할지 더 구체적으로 고민을 시작한다. 무슨 준비를 해야 할까, 운동화나 운동복 같은 장비를 먼저 구입해야 하나, 같이 할 친구를 먼저 구해야 하나. '다음 달에는 레고를 하나 사야겠다'라든가 '이번 주말에는 아이들과 나들이를 가야겠다'는 생각, 60세가 되면 강원도에서 한 달 살기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갑자기 한다. 뇌가 이렇게 정신없는 친구인지 몰랐다. 그동안 내가 억지로 주입하는 유튜브 화면에 갇혀 답답했었나 싶다. 그래도 뇌에게는 이게 쉬는 거라고 하니 기쁘다.


밥 먹을 때 밥만 먹는 사람, 버스에서 창 밖을 보며 가는 사람, 휴대폰으로 고개를 숙이지 않고 이어폰도 없이 걷는 사람이 되고 싶다. 되려면 될 수 있지만 또 그렇게 쉽지도 않다. 끊임없이 어딘가에 연결되도록 유혹하는 스마트폰이라는 무서운 물건이 있기 때문이다. 영상과 음악에 정신을 빼앗겨 실체도 없는 곳에 연결되었다가 현실로 돌아오기를 하루에도 수차례 반복한다. 그보다는 처음부터 현실에서 당근 한 조각을 경험하는 것이 낫다고 느낀다.


내 의지와 집중을 소비당하고 싶지 않다. 모든 순간을 실제로 느끼며 살고 싶다. 내가 스스로 행동하고 결정하고 싶다. 그래서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당근을 씹는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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