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태교. 왜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많은 순간들이 이 주제로 향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란 나는 어릴 적부터 많은 것들을 강요받았다. 학업, 성당, 음악, 그리고 '남자다움'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짐까지. 그때의 나는 무의식적으로 남의 눈치를 보고, 사소한 것에도 긴장하고 겁내는 아이였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의 흔적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시간은 많이 흘렀다. 어릴 적 내가 두려워하던 것들이 이제는 내 삶의 일부가 되었고, 한때의 약점이라 여겼던 것들이 오히려 나만의 특별한 강점이 되었다. 나는 조금씩 성장했고, 더 단단해졌다. 이제 난 안다. 진정한 강인함이란 무조건적인 참음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고 표현할 줄 아는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이것이 바로 내가 찾은 남자의 태교다.
우리 사회는 늘 남자들에게 뭔가를 요구한다. '참아라', '견뎌라', '남자가 그것 가지고'. 하지만 정작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여성들을 위한 힐링 공간과 프로그램은 많은데, 남자들은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다.
사실 난 운이 좋았다. 글쓰기를 통해 나를 마주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저녁이나 자정에 컴퓨터 앞에 앉아 내 치부와 약점들을 솔직하게 써내려가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법을 알게 됐다. 명상하고 성경 불경 구절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숲과 자연 속에서 사색하며 내면의 평화를 찾았다.
특히 많은 위로를 받은 건 동물들과의 만남이었다. 유기견 봉사활동을 하면서 깨달았다. 상처받은 영혼들은 서로를 알아본다는 걸. 그들을 돌보면서 오히려 내가 치유받았다. 때로는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된다는 것도 배웠고.
어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너같이 내성적이고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이 동물에 빠지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라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생각한다. 맞다, 난 사회성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과 연결되는 걸까?
오히려 난 이렇게 생각한다. 상처받은 영혼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치유를 찾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는 술을 통해, 누군가는 운동을 통해, 또 누군가는 동물들과의 교감을 통해.
'남자의 태교'는 단순히 자신을 돌보는 걸 넘어선다. 우리 안의 상처받은 어린아이를 보듬고, 억눌린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진정한 강인함은 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매주 유기견 보호소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개들은 절대 사람의 겉모습이나 지위를 보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그저 진심을 본다. 그리고 그 진심에 무한한 사랑으로 화답한다. 이런 순수한 교감이야말로 우리 남자들에게 필요한 게 아닐까?
나는 꿈꾼다. 더 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감정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세상을.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공간을. 그래서 나는 계속 글을 쓰고 싶다. 나처럼 내향적이고, 때론 부정적이고,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어서.
우리는 모두 완벽하지 않다. 때로는 실수하고, 넘어지고, 아파한다. 근데 그런 모습 그대로 우리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남자의 태교'는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천천히 치유해가는 여정. 그게 바로 진정한 '남자의 태교'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난 계속해서 이 여정을 이어갈 것이다. 더 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다. 그것이 내가 '남자의 태교'라는 주제를 택한 이유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쓰고 싶은 이야기다.
우리가 조금 더 자주 마음을 들여다보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함께 성장해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난 오늘도 이렇게 글을 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은 나만의 태교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자신만의 태교 방법을 찾아가는 여정에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