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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Apr 16. 2024

삶에 있어 공간과 여백

근무하는 날 아침, 옥상에 올라 숨 막히게 채워진 건물들을 본다. 본디 자리 잡고 있었던 올망졸망 집들이 장벽 같은 건물에 둘러싸여 속으로 속으로 숨고 있다. 그나마 공간을 만들어낸 도로에도 경적소리 울려대는 짜증스러운 차들로 붐비다. 나는 눈길 머물 공간 없음에 갑갑해하며 이내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봄 볕 쏟아져 내리는 빈 하늘을 보면 내 마음도 같이 비어진다.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이다. 그렇지만 물질이나 물체가 존재할 수 있거나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공간을 보면 이중적인 마음이 든다. 우선 푸근한 평화가 마음속에 젖어든다. 머릿속의 상념을 그 공간에 내려놓고 쉬고 싶게 한다. 한편으로 공간은 채워갈 수 있다는 미래와 희망이 있다. 아니 채워가야 하는 의무감이 들게도 한다.  


어릴 적 온 가족이 한 방에서 지냈다. 나 만의 공간이 주는 행복을 맛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아버지는 장롱을 옮겨 칸막이를 해주고 네 방이라 하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완전히 분리된 공간은 아니었지만, 나 만의 공간이 분명했다. 나의 의지대로 시간과 공간을 쓸 수 있다는 뿌듯한 포만감을 처음 느꼈으니까. 공간이 달라지면 사람의 마음가짐도 달라짐을 알았다. 


그 이후 동생들은 몰라도 나 만의 공간은 이어졌다. 물론 공부라는 압박감 때문에 그 맛을 많이 느끼며 지내는 것은 제한되었지만. 그나마 사관학교를 가면서 그 역사는 끝났다. 군 생활을 하면서 공간에 대한 느낌은 확연히 달라졌다. 그냥 주어지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는 감정이 아닌, 반드시 소유해야 하는 절박함이 들게 하였다. 군 생활에서는 직급에 따른 독립된 사무공간 쟁취를 위하여, 그리고 가정으로 보면 관사가 아닌 나의 소유인 거주공간 확보를 위해서 말이다. 어쩌면 인생은 공간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때는 공간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다. 부족한 곳, 빈 곳을 보면 늘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또한 그냥 비어 있으면 밀려난다는 조급함에 쫓기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공간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닌, 정신적 또는 지적 공간을 포함한다. 어떤 공간이든 그저 채워넣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그렇게 여기까지 쫓기듯 왔다. 그래서 물리적 공간은 갑갑하도록 채워넣을 수 있었지만, 정신적, 지적 공간은 채우다 채우다 힘에 겨워 지쳐버렸다. 


'눈을 감아 보면 내게 보이는 내 모습 지치지 말고 잠시 멈추라고' 손디아가 부른 나의 아저씨 OST 어른에 있는 가사이다. 나도 이제 멈춰있다. 아무리 애써도 내 삶의 빈 곳을 다 채울 수는 없었다. 빈 곳이 많음을 느끼고 있지만, 이제 어쩌지도 못하고 더 채우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 지금은 빈 공간 그대로가 삶이었다는 생각에 겸허해 진다. 오히려 나이들어 가며 공간의 비어있음이 좋아진다. 시간이든 공간이든 빈 곳을 보면 무작정 좋아진다. 어차피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들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생각에 아쉽기는 하지만.


책을 펼쳐 활자로 가득찬 지면을 보면, 이내 책을 덮게 된다. 쉼표가 없는 노래와 같은 답답함 때문이다. 숨 쉴 수 있는 공간, 즉 여백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여백은 '종이 따위의 글자나 그림이 있는 이외의 빈 부분'이다. 액면 그대로의 의미는 보잘 것 없다. 하지만 여백은 단순히 빈 공간이 아니다. 마음의 숨을 여유있게 쉬어가고 자세를 추스리며 재충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다시 힘을 얻어 다음 챕터를 읽어내려갈 수 있게 해준다. 이제 인생 내리막 길에 들어서니, 끝까지 지치지 않고 가려면 여백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옥상에 올라 빈 하늘 보며 마음도 비우듯, 삶의 여백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 남은 인생도 짧게 한 번 뛰고 마는 단거리가 아니고, 오래 걸어가야 하는 지루한 레이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젠 내 마음에 여백이 있어야 감동 받을 수 있고 울림을 느낄 수 있다. 여백은 단순히 놀거나 쉬는 시간이 많다고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일상을 바쁘게 살아도 여백이 많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채울 곳과 비워둘 곳을 구분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채워야 하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면서도 마음에는 푸근한 여백을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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