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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May 21. 2024

소리가 소음이 되기까지

올 들어 가장 무더웠던 날 오후, 순찰 도중 만난 입주민이 옆집 소음에 대해 하소연을 했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 괴롭다고 한다. 할 수 없이 해당되는 세대에 연락을 해서 민원이 들어왔음을 알리고 주의를 당부했다. 그랬더니 대뜸 하는 소리가 그 집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몇 번 이야기하려다 참았다고 한다. 이번에도 선선히 중재가 되지 않았다. 매번 이런 식이어서 전체를 대상으로 소음 자제 안내방송을 하면서 상황을 종료시킨다. 답답한 마음에 소음 관련 민원 사례를 확인해 보니, 년 간 사십 여건, 한 달에 네 건 정도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런데 처리 결과는 항상 매끄럽지 못했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소리만 들어주다가 대부분 안내방송으로 마무리되는 형국이었다. 문제해결은 소음 낸 사람의 행위 인정에서 시작되어야 하는데, 순순히 인정하는 경우를 만나기가 너무 힘들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래층 사람이 관리실을 통해 우리 집이 아침시간에 소음이 많다고 불편을 호소했다. 심히 당황스러웠다. 애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출근만 하고 나면 집에는 아무도 없다. 그래도 신경이 쓰여 아내에게 소음에 신경을 쓰라고 당부하고 실내 슬리퍼를 구입해서 신었다. 그런데도 또 한 번 불편한 요청이 왔다. 살짝 기분이 태도가 되려는 느낌이 올라왔다. 관리실에 의의를 제기했더니, 조금 상세한 불편 내용이 전해졌다. 새벽까지 영업일을 하고 그 시간 대에 잠을 잔다는 거다. 그래서 자그마한 소음도 신경 쓰여 잠들기 어렵단다. 우리는 그 시간이 한참 출근 준비할 시간인데???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차분하게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는 더 절박하다고 생각하니, 한편 이해되는 점도 있었다. 그 이후 출근 준비는 극도의 침묵 속에서 진행되었다. 몇 달 후 이사 갔다는 말을 듣고 경계경보를 해제했다. 이렇듯 일상적인 생활소음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인식 차이에 따라 심각한 불편소음이 되기도 한다. 갈등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었지만,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 본 덕에 인상 붉히는 일 없이 지나갔다.


반면, 윗집은 어린아이가 둘이나 있는 집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달리기를 한다. 아랫집에 당한 걸 생각하면 당연히 관리실에 민원을 제기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도 애들 키우는 때가 있었는데 생각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위층 애들 어머니는 예의 바르고 선한 사람이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애들 때문에 많이 시끄럽죠. 조용히 시킨다고 하는데 말을 잘 안 듣네요. 죄송해요." 한다. 그 이후에도 볼 때마다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다. 오히려 우리들이 먼저 미안할 정도다. 그 이후 아이들의 뛰어다니는 소음은 잘 들리지 않았다. 소음의 크기, 지속성, 시간대.... 뭐 이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미리 자신이 한 행위를 직시하고 그것이 미칠 영향을 예측하여 사리에 맞게 행동하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소리에 아주 민감하다. 이상한 소리만 들리면 신경이 날카로워지며 불안감이 든다. 잠수함을 탈 때부터 들여진 습관과 같은 거다. 잠수함은 은밀성이 생명인데, 이것은 소음과 직결된다. 수중에서는 누가 상대의 소음을 먼저 듣는가에 따라서 승부가 갈린다. 그래서 잠수함은 추진기, 장비에서 나는 기본적인 소음 외에 불규칙하게 발생되는 소음을 극도로 경계한다. 잠수함에 가면 '내가 만든 소음!! 어뢰 되어 돌아온다.'라는 문구를 부착해 놓고 경각심을 높이고 있다. 어쩌다 소음을 유발한 사람은 스스로 "소음 발생"을 보고하여 음탐 당직자의 혼선을 미연에 방지한다. 이런 분위기를 떠나온 지 십 년이 지났는데도 특이한 소음에 대해 민감해하는 것은 여전하다. 하물며 이런 나를 관대하게 만든 위층 애들 어머니는 인생을 달관한 사람 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보여주었다.


내가 노래를 틀어놓고 운전하고 있을 때, 아내는 신경 쓰이는 게 있으면 먼저 노래 볼륨부터 줄이라고 한다. 내가 즐기는 만큼 노래를 좋은 소리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거다. 어쩌면 아내는 노랫소리를 거의 소음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단지 내가 좋아하니까 참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어떤 사람은 좋은 음악이라며 듣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시끄럽다 한다. 좋은 음악이라고 듣는 것은 소리이고, 시끄러운 것은 소음이다. 같은 소리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소음이 될 수 있다. 이렇듯 부부사이라도 예외는 없다.


소음은 불규칙하게 뒤섞여 불쾌하고 시끄러운 소리다. 한마디로 듣기 싫은 소리다. 소음도 소리의 일종이지만, 소리가 소음으로 바뀌는 명확한 물리적 기준은 없다. 소리와 소음을 구별하는 기준은 주변환경, 개인의 심리상태 등에 따라 바뀌는 상대적 감각이다. 내가 낸 소리가 소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다분히 상대편의 감각에 좌우된다. 그러니까 내 기준으로 소음이 아니라 단정하는 것에서부터 갈등의 시작될 수 있다. 자신의 소음이 문제가 될 것으로 예측되면, 사전에 양해를 구하거나 경보적 성격의 공지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문제가 되었다면, 일단 인정하는 행위가 우선되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의의 제기는 그다음 단계이다.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분위기에서 갈등으로 번지는 모습들을 자주 접하게 되니 심히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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