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감정조절의 시험대에 서다

생각과 의지가 늘 감정보다 앞서야 한다.

by 버티기

오랜 군 생활을 퇴직한 후, '액티브 시니어'가 되려고 시작한 여정이 순조롭다. 표면적으로 보면 자격증을 따고 경력도 쌓고, 이제 자격증에 어울리는 직책에 취업해서 근무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직책에 걸맞은 경험이 부족한 탓에 늘 쫓기는 마음의 연속이다. 위로는 신뢰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 아래로는 전문성에 대한 의심을 받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게 벼락공부로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난한 인고의 시간이 필요한 것임을 알고 있기에, 절박한 마음 하나로 버텨 나가고 있다. 그 세월이 벌써 팔 개월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이럭저럭 경험을 쌓아가고 있는 가운데, 요즘 또 하나의 고민거리가 생겼다. 불쑥불쑥 감정 조절이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어서다. 그 첫 번째 계기는 엘리베이터가 제공했다. 네 대 뿐인데 반해 이용해야 할 인원이 너무 많다. 출퇴근 시간은 가히 전쟁터와 같다. 더구나 그중 한 대의 고장 상황이 겹치게 되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해 버린다. 관장해야 할 업무 중에 극히 일부분임에도, 이럴 때면 블랙홀이 되고 만다.


출근 시간대에 엘리베이터 한 대가 고장 난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 날, 수리기사들과 함께 현장으로 갔다. 길게 이어진 줄 속에 있던 한 입주사 직원이 유니폼을 확인하고는 득달같이 달려왔다. 이미 짜증이 날대로 난 그는 대뜸 삿대질을 하면서 험한 말들을 내뱉었다. "관리비는 엄청나게 받아 처먹으면서 왜 맨날 이모양이냐?, "....... 지면이 아까워 다 적지는 않겠지만, 이곳에 온 이후 가장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에 보인 나의 행동이다. 정색한 채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무슨 말을 그 따위로 해."....... 줄을 서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었고, 대부분 그 사람의 심정적 우군들이었다. 다행히 그가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통에 일단락은 되었지만, 자칫 더 큰 싸움으로 번질 뻔한 상황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앉았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웬만하면 참고 이해하는 것이 특기였는데, 조금 전의 돌발적인 행동은 나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전개되었을 최악의 상황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어쩌면 본래의 내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퇴직 후의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 스트레스를 쌓아가는 일로 변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럴 거라면 굳이 일을 지속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지나가는 과정에서 맞게 되는 해프닝으로만 여기기에는 전해지는 충격이 너무 컸다. 그날 이후,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에 대해 정말 많은 숙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민원이 폭주하던 날, 감정조절의 미숙함을 드러낸 두 번째 일이 발생했다. 관리실을 통해 접수된 민원은, 이 층에 입주해 있는 업체 사무실의 전원이 나갔다는 것이었다. 기사들이 다른 민원을 처리하러 가버려 상황 파악 차원에서 먼저 올라갔다. 그런데 있을 만한 장소에 그 사무실 전원 차단기가 없었다. 종종 리모델링을 하면서 차단기 위치가 변경된 사례들을 봐왔기 때문에, 오래 근무한 기사에게 확인해 보기로 하고 사무실 대표에게 조금 기다려 달라는 양해를 구했다. 선선한 이해를 기대했었는데, 반응은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격앙된 목소리로 "이게 뭐냐? 자료가 다 날아가고.., 관리비는 엄청 비싸게 받아먹으면서..." 또 한 번 감정조절의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일순간 언성이 높아지면서 말이 빨라졌다. 당황한 대표의 얼굴을 본 후에야, 본래의 톤을 회복하고 차분하게 시간이 필요함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마침 도착한 기사들과 찾아낸 차단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있었다. 곧바로 전원을 살려주고 사무실의 기기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확인한 후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른 업무를 보고 있는데, 아까 언성을 높이면서 대꾸한 일이 마음에 걸렸다. 그 사무실에 올라가 대표에게 상황 설명을 다시 하고 늦게 해결해 준 점에 대한 사과를 했다. 한 시간이 경과된 후, 대표 자리만 전원이 나갔다는 민원이 들어왔다. 그곳에 도착해 바닥 패널을 들어 올리며 추적한 결과, 이전에 깔아놓은 전선의 연결 부위에 문제가 있었다. 스파크가 일어나고 있었고, 그을린 흔적도 발견되었다. 자칫 더 큰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었는데 잘 발견된 케이스였다. 아까 사무실 전체의 전원이 나갔던 원인도 드러난 셈이었다.


이 상황에서 주목할 점은, 감정조절 측면에서 조금은 성숙해진 나의 태도였다. 반응은 그 사무실 대표의 달라진 태도로 나타났다. 두 번째 민원을 받고 해결하는 내내, 많은 시간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협조적인 모습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변화된 반응을 이끌어낸 요인이 무엇일까? 그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과감하게 정중한 사과의 성의를 보인 것에서 기인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조절은 '느낀 감정에 휩쓸려 버리거나 끌려가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정이 생긴 그 순간, 그 강도를 조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것은 사태를 이성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것이 쉬운 일이라면 무슨 문제가 되겠나. 장시간의 훈련을 통해서도 달라지기 힘든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종종 조절에 실패하고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행동을 표출하기도 한다. 나는 그 어려운 김정조절의 시험대에 서있다. 감정은 늘 생각과 의지보다 앞서 있다. 바로 그것이 주목해야 할 요점이다. 생각과 의지가 감정보다 앞설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할 듯싶다. 경험이 부족한 것은 시간이 가면 해결될 수 있지만, 스트레스를 감정과 연결해 분출하는 것은 '액티브 시니어'가 되는 과정에 독으로 작용할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바람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