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영험하다
'우리말 겨루기' 프로를 자주 시청한다. 글을 쓰기 시작하고부터 애청자가 되었다. 이 프로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우리말 참 어렵다는 것이다. 보면 볼수록 배우고 익혀야 할 말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다. 우리말을 더 가까이 접하면서 특히 어려웠던 것은, 용어의 의미 구분이었다. 그중 하나가 동음이의어와 다의어였다. 인터넷 뒤지고 챗 지피티도 동원해서 겨우 개념은 깨우쳤지만, 어렵다는 생각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바람'이라는 말을 만났다. '바람'은 동음이의어이기도 하고 다의어이기도 한 고급 단어였다. 단순하게 '대기의 움직임' 만을 떠올렸는데, 다가갈수록 그 쓰임새가 다양하고 깊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보라매 공원을 걷다가 평상에 누워 나뭇잎 사이로 좁은 하늘을 바라본다. '평상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것', 아내의 버킷리스트이다. 어릴 적 마당 한가운데 평상이 있었고, 한여름 저녁시간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단다. 장모님이 자작자작 끓여낸 우렁 강된장에 호박잎 쌈밥은 아직도 침 고이는 맛이었다 했다. 그 맛을 즐기기에는 평상이 제격이고, 그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더없이 행복한 기분이 들었단다. 여기까지로 보면 평상이 중심인 것 같지만, 그 풍경 이야기 속에는 늘 새초롬한 바람이 빠지지 않았다. 평상은 이 바람을 온전히 즐기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아내는 몇 번을 내게 말했다. 그 바람은 더위를 달래주는 것뿐 아니라, 기분 좋은 기억을 날라다 주는 듯한 신기하고 묘한 느낌이 있었다고 했다.
나의 기억 속에는 평상의 추억이 없다. 큰 마당이 있었던 적이 없으니, 평상의 추억도 만들기 어려웠다. 그러니 아내가 평상놀이를 좋아하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그러다 살기 위해 따라 했는데, 어느 절에 내가 그 맛에 푹 빠져버렸다. 적어도 바람의 맛을 느낄 수 있던, 칠월 초순까지는 그랬다. 폭염의 횡포에 밀려 바람이 사라진 지금, 평상 근처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바람은 무형의 기류로서 지리적 이동을 하지만, 그 세기를 통해 감정과도 연결되는 오묘함이 있다. 또한 마음속 움직임을 일으켜 향긋한 기억을 실어다 주기도 한다. 바람이 무척 그리워진다. 목덜미를 찹찹하게 훑으며 기분 좋은 생각 떠올리게 하는, 그런 바람이 기다려진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젊을 때부터 이어져 오는 취미이고 장르를 구분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 노래를 누가 불렀는지에 따라 선호도가 달라진다. 요즘 이 노래 저 노래 따라 부르면서 느끼는 게, 제목에 '바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노래가 많다는 것이다. 아마 '사랑' 다음으로 많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다. 만약 제목을 나열한다면 무척 지루해할 것 같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는, '바람이 전하는 말'과 '바람의 노래'이다. '바람이 전하는 말'은 '바람의 말'이라는 마종기 시인의 시를 양인자가 인용해서 작사한 것이고, '바람의 노래'는 김순곤이 조지훈, 서정주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작사한 곡이란다. 내가 이 노래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가사에 등장하는 의미심장한 '바람' 때문이다.
'바람이 전하는 말'에서 '바람'은 의인화하여 표현되었다. "바람이 불어오면 귀 기울여봐", 세상에 없는 내가 바람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고 있다. "바람소리라 생각하지 마", 내가 전하는 말은 그냥 지나가는 바람소리로만 여기지 말라는 말이다. 삶이 고독하고 괴롭지만 작은 일에 행복을 느끼며,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쓸쓸하고 속상해도 추억을 곱씹으며 따뜻하게 살아가라 당부한다. '바람의 노래"에서 바람은 모든 걸 알고 있는 절대자에 가깝다. 바람이 노래를 통해서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삶의 해답을 알려주고 있다. 지는 꽃,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 필연적인 실패와 고난의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는 사랑을 삶의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다.
두 노래에서 표현된 바람은 평상에서 즐기는 바람과는 사뭇 다르다. 바람에게 고유의 역할에 더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과의 관계를 연결하고 있다. 때로는 감정이나 사연을 담아 전하는 통로로, 삶의 의미를 되새겨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일깨워 주는 존재로 여기기도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롯해 많은 국가에서 바람을 신격화하는 사례도 볼 수 있다. 어쩌면 바람은 사람의 삶과 무척 닮아있기도 하고, 반면에 사람이 희구하는 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점은 같지만, 유한한 인생에 비해 바람은 영원히 자유롭기에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이 계절에 불현듯 바람이 보고 싶어 졌다. 후텁한 불쾌감을 데려갈 믿음직한 바람, 인생을 지혜롭게 살도록 귀엣말을 속삭여 줄 바람이 무척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