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도 향기가 있다
그 사람이 찾아왔다. 점심시간이 다가올 무렵, 불쑥 사무실로 들어왔다. 양손에는 음료와 빵이 들려 있었고,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연신 웃고 있었다. 그가 이 사무실을 떠난 지 3개월여 만이었다. 전에 임플란트 수술했던 병원에 왔다가 들렸다고 했다. 채 십분 지났을까, 몇 마디 나누지 못했는데 가려고 일어선다. 점심식사를 같이하고 가라 했지만, 부득불 가야 한단다. 계속 재촉하니 마지못해 "집에 가서 딸 밥을 차려 줘야 한다."라고 했다. 그제야 급하게 퇴직했던 이유가 생각났다. 딸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하반신 마비가 왔고, 보살펴 줘야 한다고 했었다. 다행히 하반신 마비는 풀렸지만, 아직 혼자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란다. 구부정해진 그의 등뒤에 "담에 한 번 연락할게요."라고 던지고는 멀어져 가는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조금 전 그가 앉았던 자리를 지나는데, 기분 좋은 향기가 난다. 그는 점심시간 내내 머릿속에 머물며, 기억을 삼 개월 전으로 데려갔다. 그의 전임자는 윗사람과 심하게 다투고 퇴직해 버렸다. 이주일이 지났을 무렵, 그가 쭈뼛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첫 모습은 두세 살 연상으로 보였다. 얼굴에 주름이 많아서 더 그렇게 보인 것 같았다. 통성명 후에 나이를 따져보니, 웬걸 내가 두 살이 더 많았다. 공무원 생활을 삽 십 년 가까이했다는 이력은, 초면의 어색함을 쉽게 떨쳐버릴 수 있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숨겨왔던 나의 삼십 년 넘는 군생활 경력과 초록동색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먼저 듣지 않았어도 공무원이었음을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늘 자신의 책임에 당당했고, 일시적이라도 비굴함을 택하지 않았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게 몸에 배어있었다.
근무를 같이 하면서 들었던 그의 인생역정은 무겁고 심각했다. 딸에게는 치료되지 않는 고질병이 있었고, 평생 안고 가야 할 짐이었다. 그래도 딸이 극복하려는 의지가 강해서 공무원까지 되었으나, 스트레스가 겹치면서 사달이 나고 만 것이다.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보살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그것뿐인가, 자신도 생사를 오가는 심각한 상황을 지나왔다. 암 3기 판정을 받고 공무원 생활 휴직한 후, 겨우겨우 회복하여 복직했다고 했다. 아직도 재발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지나오면서 부인이 감당했을 무지막지한 짐도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본 그의 얼굴은 너무도 해맑았다. 마치 자신의 불안하고 음습한 기운이 남에게 전해지지 않게 하려는 듯 보였다. 차츰 개인사를 알게 되면서, 잘 견뎌온 것은 둘째치고 타인에게 온전히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 더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근무한 지 이 주정도 지났을 무렵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과장이 두 명이니 돌아가면서 한 달에 한 번씩 밥을 사는 건 어떻나요?" 처음에는 말하는 의도를 정확히 몰라서 떨떠름하게 긍정 표현을 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다음 날 바로 기사 두 명 포함해서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물론 계산은 그가 했다. 사무실에 둘 만 있을 때 넌지시 물었다. "왜 한 달에 한 번씩 밥을 사자고 했어요?"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분위기가 삭막해 보여서 그랬어요." 나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했지만, 단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치부하고 지나왔었다. 일하는 방식에서도 남달랐다. 시간이 걸려도 일단 자신이 먼저 해결을 시도했고, 남의 시간을 빼앗는 일은 최대한 자제했다. 보다 못해 내가 먼저 제안해서 그의 일을 같이 해결한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분명한 것은 그가 이곳에 온 이후로 사무실 분위기가 온화해졌다는 것이다. 정감 있는 대화도 오가고 스스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렇다. 그는 근본적으로 마음이 따뜻한 남자였고, 어디를 가나 주위를 환하게 비추고 따뜻함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와 나는 스쳐가는 인연일 수도 있다. 불과 삼 개월도 채 되지 않는 근무연 밖에 없으니까. 아마 그가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점점 기억 속에서 잊히고 말았을 것이다. '진정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은 구분해서 인연을 맺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언뜻 지당한 말씀 같은데, 무엇으로 그 인연을 구분해 내느냐 하는 물음에는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결국 시간이 지나 봐야 그 인연의 진가를 알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이제 그를 진정한 인연으로 만들고 싶다. 등뒤에다 인사치레로 던졌던, "담에 한 번 연락할게요."라는 말을 허언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가 만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길 때를 기다리겠다. 그리고 만난다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대해왔던 나의 행동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 또 숨겨왔던 모든 것들을 드러내어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