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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 마주치는 풍경들

by 버티기

평일 오전 7시 45분,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선다. 칠 개월째 어김이 없다. 보라매공원을 가로질러 회사에 도착하면 8시 15분이다. 시간은 삼십 분이 소요되고, 걸음 수로는 삼천 삼백 걸음 정도이다. 나의 일상 중에서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다. 자연스레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 사색도 하고 주위를 관찰하면서 마음껏 상상할 수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이전 근무지에 출근할 때, 숨 쉴 틈 없는 7호선의 손잡이에 매달려 아무 생각 없이 가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호강이다.


마침 5월 22일부터 보라매공원에서 개최된 국제정원박람회는 출근길 호강의 금상첨화다. 수목과 꽃에 대한 감흥의 정도가 크지 않던 나도, 꽃향기와 초록으로 버무려진 유혹에는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준비과정부터 변화되는 과정을 지켜봐 왔지만, 개막과 동시에 펼쳐진 화려한 변신은 정말 놀라웠다. 특히, 사람들이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만들어 만남과 대화를 이끌어 낸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공원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를 찾기 힘들었는데, 고품격의 재미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되었음에 감탄했다. 오늘도 이런 호사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사색과 상상을 즐기며 출근하고 있다.


항상 좋은 점 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있었다. 그것은 보라매 공원 입구의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위반'으로 적발된 것이다. 이곳 신호등은 무척이나 길다. 그래서 시간이 잘 안 맞으면, 느낌상 오분은 족히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걸으며 사색과 상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횡단보도까지 거리가 꽤 남아있었지만, 신호가 파란불로 바뀐 것이 보였다. 이번에 건너지 못하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횡단보도 쪽으로 길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아뿔싸! 그날따라 경찰들이 단속 중이던 것이다. 바로 앞 버스정류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생전 처음 경찰관에게 삼십 센티나 되는 이 만 원짜리 범칙금 용지를 수여받기도 했다.


출근길에 또 다른 묘미는 스쳐 지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상상해 보는 것이다. 회사로 가는 동선에서 거의 매일 만나는 네 사람이 있다. 두 명의 여성과 한쌍의 부부이다. 공교롭게도 나이대는 나와 유사하고, 출근 경로 상에서 순차적으로 만나게 된다. 집을 나와 첫 번째 횡단보도를 전후해서 만나는 여성은 항상 눈을 내리깔고 지나간다.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없다. 칠 개월째 만나면서도 항상 같은 모습이다. 조금 늦게 출발한 날 아파트 내에서도 만난 것을 보면, 같은 곳에 살고 있거나 이곳으로 일하러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그리 즐겁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자주 만나면서 길 정 쌓은 사람 입장에서 그분에게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웃음 머금고 주위를 돌아보며 당당히 걷는 모습으로 만나게 되기를...


큰길로 나가는 어귀에서는 손을 꼭 잡고 이야기에 열중하며 걸어가는 부부를 만난다. 아마도 이른 시간에 나가 산책을 하고 온 듯, 편한 복장을 하고 있다. 아내와 가끔 손잡고 걸어보려고 시도는 하지만, 서로 남사스러워 손을 거두곤 한다. 그런데 그 부부는 정말 천연덕스럽다. 그건 젊을 때부터 해오지 않았으면 불가능할 것 같다. 필경 살아오면서 좋은 일만 있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그리 다정할 수 있는지 놀랍다. 가끔 아내와 같이 걸어갈 때 "같이 좀 갑시다." 핀잔을 듣고는 보조를 맞추곤 한다. 매일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도 궁금한 대목이다. 필요한 이야기를 마치면 서로 침묵을 즐기는 우리 부부와는 사뭇 다르다. 추측건대 인생역정의 중대한 고비를 함께 헤쳐 나오면서 쌓인 이야깃거리 때문에, 더 진한 연대감이 들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도란도란하면서 백년해로하시기를...


범칙금 용지를 받았던 건널목을 가기 전, 곧게 뻗은 길에서는 '꼿꼿 여장수'를 만난다. '꼿꼿 여장수'는 내가 붙인 별명이다. 고개를 세워 정면을 응시한 채 걸음걸음 정확한 보폭을 유지하고 걷는 모습에서 생각해 내었다. 멀리서 서로를 인지한 후, 가까워지면 어색해서 눈을 깜빡이며 지나는 모습이 재밌다. 이분은 항상 원피스 룩이고, 요즘은 거기에 양산을 바쳐든 모습이다. 퇴근보다는 출근하는 모습에 가까우며, 아마도 지나쳐온 학교에 선생님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한치에 빈틈이 없는 모습을 보면, 학생들에게는 완고한 원칙주의자처럼 비칠 것 같다. 그렇지만 무조건 숨 막히게 몰아붙이는 것은 아니고, 완급을 조절하며 결국엔 바른 길로 이끄는 모습이 그려진다. 가까운 시일 내에 퇴직이 예상되지만, 학생들에게 오래 존경받는 분으로 남기를...


항상 같은 길을 오가지만, 퇴근길과 출근길은 사뭇 다르다. 퇴근길이 '오늘도 무사히'라는 안도감으로 안식을 희구하려는 감정이라면, 출근길은 '오늘은 어떤 일이'라는 기대와 긴장이 공존하는 감정이 된다. 그래서 나는 출근길이 더 설레고 기분 좋은 흥분을 느낀다. 출근길에서 즐기는 사색과 상상은 오늘을 대하는 마음을 가다듬게 하고 긴장을 누그러뜨려 준다. 보라매공원을 벗어나기 전, 평상과 그루터기 의자가 놓인 장소에 들른다. 사오분 남짓한 시간이지만 땀을 식히며 생각을 정리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딴딴하게 보낸 오늘이 결국 내일의 후횟거리를 줄일 수 있다는 믿음을 다지면서, 그리고 근무지의 출입문을 힘차게 열어젖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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