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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Nov 17. 2023

머나먼 항해

잠수함을 타고 하와이를 간 적이 있었다. 장장 한 달간 수중으로만 항해해야 하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더구나 정해진 교육을 받고 처음 부임한 잠수함에서 첫 항해로 하와이를 간 것이다. 출항하고 나니 계급은 아무 쓸모없는 장식에 불과했다. 뭘 모르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승조원으로 취급해주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깜깜이 항해가 시작되었다.


잠수함이 도입된 이래 하와이까지 수중항해는 처음이라, 승조원들 모두 초긴장 상태였다. 작은 소음, 미세한 함 요동에도 큰 소리가 오가고 행동이 빨라지는 해프닝이 자주 있었다. 경험이 없던 나는 무감각 상태였고, 그저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전탐 부사관들이 해도에 흥미롭게 그려놓은 '하와이 야자수'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망망대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그래도 망망대해에는 시각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만, 수중에서는 그냥 해도에 찍혀있는 추정된 위치만으로 그 망망함을 가늠할 수 있을 뿐이었다. 며칠을 항해해도 위치의 변화를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끝 모를 항해가 이어졌다. '하와이 야자수'는 볼 수 있을까? 그야말로 '머나먼 항해'였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후, 나는 또 하나의 '머나먼 항해'를 하고 있다. 아마도 더 기나긴 항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항해의 '하와이 야자수'는 '친구 같은 아빠'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나 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아내가 염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나도 데면데면하는 나와 아들들 관계를 무척이나 안타까워한다. 언제든 어색한 부자지간을 유화모드로 바꾸고자 하는 아내의 노력은 눈물겹다.


큰 아들이 태어날 무렵, 나는 아버지로서 아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군의 바쁜 직책에서 불철주야 근무에 열중하면 다 해결되는 줄 알았다. 아내는 여름 초입에 출산하고 역대 최악이었던 1994년 폭염을 유난히 보채는 아기와 씨름하며 보냈다. 나는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전혀 가늠하지 못했다. 피곤한 몸으로 잠자다 아기 울음소리에 깨면 짜증만 낼 줄 알았다. 가족은 생겼으되 몸과 마음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완고하고 강압적이던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들들이 다 클 때까지도 한국의 전형적인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군에서 전역한 이후, 그 간격을 좁히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같은 극성의 자석처럼 가까이 간만큼 멀어지는 현상이 늘 반복되었다. 나에 대한 아들들의 정서적 거부감은 쉽게 녹지 않았다. 그래도 아내와 나는 어떻게든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간극을 좁혀보려 노력했다. 궁즉통이라던가, 아직 '하와이 야자수'는 멀리 있었지만 미세하나마 아들들과의 거리는 좁혀지고 있었다.    


내친김에 아내는 좀 더 욕심을 부려 가족여행을 계획했다. 여행의 목적지는 강릉의 바닷가였고 1박의 여유까지 포함했다.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나는 근무교대를 하고 회사 근처에서 가족들의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중에 아내로부터 카톡이 왔다. "큰아들이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터프하게 운전하고 있다. 불안해서 못 보겠으니 도착하면 강릉까지는 나보고 운전해 줘."라는 것이다. 사실 큰아들의 운전교습을 내가 시켰었고, 겨우 일 년이 조금 지났을 뿐이었다. 그사이 혼자서 운전하는 게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다른 사람들을 태웠을 때 안정감을 주는 것이 부족했던 것 같았다.


본인이 계속 운전하겠다는 것을 겨우 달래서 내가 운전해서 강릉까지 갔다. 아내도 긴장을 풀고 안심하는 눈치였다. 아내는 내가 운전해도 운전태도나 과속에 무척 민감해하며 잔소리를 한다. 그래서 아내를 태우고 갈 때면 늘 긴장하는 자세가 되었다. 하물며 운전교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큰아들의 운전이 불안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나는 큰아들의 입장을 고려해 그냥 운전하게 하려 했었다. 그런데 아내가 워낙 예민했고 의지가 완강했기에, 부득불 내가 운전석에 앉았다.


사건은 다음 날 숙소를 떠날 때 일어났다. 운전하겠다는 의지가 워낙 강했던 큰아들이 운전대를 잡았다. 점심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이동하는 길은 좁았다. 그 길을 좀 빠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달리던 중, 옆에서 들어오는 차로 인해 충돌할뻔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당연히 아내가 "좁은 길에서 왜 그렇게 빨리 달리냐?"라고 짜증을 냈다. 문제는 큰아들의 반응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을 불신하고 있다는 것에만 불만을 터트리며 언성을 높이는 것이다. 결국 내가 고함을 치면서 운전대를 뺐었다. 이대로 서울까지 갔을 경우, 아내가 받을 스트레스를 고려하면 불가피했다. 아내는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한 몸살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큰아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내가 회심의 아이디어로 추진해서 다녀왔던 여행은 오히려 악수가 되었다. 그나마 어렵지만 줄여왔던 간극이 휑하니 커져버렸다.  '하와이 야자수'가 아예 해도에서도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자신의 예민함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되어 마음적 고통을 받고 있었다. 큰아들이 데면데면했어도 집에는 왔었는데 한동안 집에 오지도 않았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나의 생일날 어쩔 수 없는 화해의 기회가 주어졌다. 큰돈을 들여 선물도 준비해 온 큰아들에게 "그때는 아버지가 미안했다."라고 사과를 먼저 했다. 큰아들도 "죄송해요. 그때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여서 예민하게 행동했습니다."라고 답례를 했다. 그때서야 생각났다. 더 큰 회사 이직을 위해 도전했으나, 그날 안 좋은 결과가 통보되었다는 사실이.


운전이라는 단편적인 불편함에만 머물러있어, 기분까지 보살피지 못했다. 소통은 쌍방향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그리고 늦게나마 서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서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아마 큰아들도 자신 이외의 사람을 태우고 운전할 때, 안정감을 느끼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았으리라 생각된다. 어쩌면 더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었다는 마음의 안위를 가져본다. 뿌~~~ 웅 크게 기적소리를 울리며, '친구 같은 아빠'가 되기 위한 항해를 다시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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