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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Dec 12. 2023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다

올 들어 제일 추워진 날, 2개월 만에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워낙 뉴스에서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목도리와 장갑을 챙겨서 나섰다. 열한 시 이십 분쯤 들어간 고깃집은 아무도 없었고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사장 내외의 인사마저 기대 수준을 밑도는 인색함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단골집이고, 지금까지 줄곧 이 고깃집에서 만나온 것에 비하면 내 인사에 대한 리액션이 미미했다. 아마도 아버지가 나를 만날 때 외에는 올 기회가 없었던 듯하다. 매번 같은 자리, 같은 메뉴라 따로 주문할 필요도 없어, 난방만 조금 더 올려달라 하고 앉아 기다렸다.


약속한 시간을 맞춰 고깃집에 들어선 아버지는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한 겨울에 만날 때도 콤비 위에 덧입지 않았었는데, 추위에 조금 약해진 듯 보였다. 손에는 조그만 선물 박스가 들려 있었고, 갈 때 가져가라면서 나에게 넘겨주었다. 문득 전에 만났을 때 받았던 식료품들이 이미 많이 상해 있어, 아내가 잔소리했던 기억들이 떠올려졌다. 그래도 이건 선물 박스에 담긴 것이니 상한 것은 아니겠지 생각했다.  아버지는 여기저기서 들어온 것들이 어떤 상태인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들고 오는 것 같았다.  


소주 한 병에 맥주 두 병. 아버지와 만나면 먹는 술의 양은 항상 일정하다. 전에는 맥주가 몸에 안 좋다고 꺼렸었는데, 이젠 당연한 듯 섞어 마시는 것으로 변했다. 아마도 술이 더 순해질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술이 들어가면서 시작된 대화는 모두 내가 끌어가야 했다.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먼저 뭘 물어보는 게 없어졌다. 몇 번이나 말했던 나의 근황도 처음 들은 것처럼 되물었고, 손자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 항상 자기본위로 생각하는 성향이 있기는 했지만, 혼자된 이후에 더 심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자리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골목길을 돌아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한참 서있었다.  


요즘 들어 난 아내와 다툴 일이 없어졌다. 아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맞추고 행동하려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전보다 대화도 많아지면서 오래 사귄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와 관련된 주제에 이르면 분위기가 냉랭해진다. 그럴 때마다 특별한 반박 하지 않고 자리를 피해 버리곤 한다. 아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매번 반복되는 이야기라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묻어놓고 지나가기는 하지만 가슴에 항상 답답함으로 남아있다.


아버지는 신혼 초부터 며느리를 자식 다루듯 했다. 특히, 가리지 않고 툭툭 내뱉는 말에 아내는 많은 상처를 받았다. "너는 집에서 교육을 그렇게 받았냐?", "어떻게 기본적인 예의를 모르냐? 등등 상대편의 감정 따위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극단적인 상황까지 발전되어, 내가 나서서 아버지와 다툰 적도 있었다. 통상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문제가 되는데, 정작 어머니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금전적인 요구가 잦았다는 것이다. 연금을 받으면서도 '자식 된 도리'를 강조하면서 많은 부담을 주었다. 자식에게는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분위기에서 자란 아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이었다. 그래서 결혼생활 내내 아버지는 아내와의 주요한 갈등 촉발요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아버지로 인한 갈등은 동생부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둘째 며느리는 아버지와 같은 지역에 있음에도 거의 왕래를 끊다시피 하고 있다. 그나마 살갑게 보살피던 막내딸도 남편 직장 따라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서 자주 오지 못하고 있다. 이젠 명절 때 가족들 모여 아버지와 식사하는 것은 언감생심이 되었다. 자연스레 동생들과의 관계도 전과 같지 않다. 별수 없이 명절마다 장남의 '자식 된 도리'를 위해서 아내와 같이 가서 식사를 하고 온다. 아내는 명절 일주일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고, 응축된 짜증은 고스란히 내가 받아내며 감수하고 있다.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지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한다.     


최근 아내의 아버지에 대한 잔소리 이슈는 세 가지다.

 첫째는 명절 때마다 집에 가면 늘어가는 약 박스이다. 마치 미로처럼 지나서 거실까지 가야 한다. 아마도 노인을 상대로 하는 약장사들 소행이 계속되는 것 같다. 둘째는 아버지가 일주일마다 봉안당 어머니를 보러 가는 것이다. 삼 년이 지났는데도 변함이 없다. 남동생이 쉬는 날을 희생해서 매번 동행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셋째는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놓은 것이다. 온 방이 정리되지 않은 짐으로 빠끔한 구석이 없다. 정리를 할라치면 화를 내면서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  


아버지집에 다녀오기만 하면, 이 세 가지 잔소리가 고장 난 축음기처럼 반복된다. 그러고 보니 명절 전후 일주일씩은 커다란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기간이다. 난들 왜 잔소리 듣지 않을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보지 않았겠는가? 아버지와 만나면 약을 받게 된 경위와 진행 상태를 캐묻지만, 항상 "다 정리되었으니, 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한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약박스와 어머니 유품을 정리해 준다고 하면, 단번에 "내가 괜찮은데 니들이 왜 난리냐."라고 일갈한다. 이번에 만났을 때는 조심스럽게 일주일마다 봉안당에 가는 문제를 거론했다.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며 썩소를 날리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어색한 시간을 깨기 위해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전, 아내는 "장남인 당신이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 가지에 대해 강하게 의의를 제기하여 바꿔 나가야 한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두 시간 가까이 아버지와 보냈지만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집에 가면 결과가 어땠는지 닦달당할 것을 상상하며 서울 가는 버스에 올랐다. 강남터미널에서 지하철을 타러 발걸음을 옮기는데, 흡연장에서 담배를 맛있게 빨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담배 연기로 날려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지만, 이내 제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재촉했다.


아버지 하면 조금은 차가운 얼굴이 떠오른다. 살아온 과정이 순탄치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의붓어머니 밑에서 꽤나 고생과 핍박을 받으며 불행하게 살았다. 그래서 성격이 원만하지 않고 혼자만 생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해야 할 말이나 하고 싶은 말은, 상대편의 감정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꼭 하고 지나가야 직성이 풀린다. 어쩌다 조용하면 그냥 참고 있는 것이지 이해해서가 아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멀리 달아나게 만든다. 그것으로 인해 당신을 더 불행하게 만들 것임에도 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해소해 줄 대상으로써 엄청난 압박을 받고 컸다. 그러다 보니 나의 행동 하나하나는 아버지에 의해 통제되었다. 결혼 후의 생활에도 아버지의 영향력이 미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말이라면 반박 없이 따르려는 성향이 강했다. 급기야는 이런 일들로 인해 아내의 원망을 사는 경우가 잦아졌고, 심각한 갈등요인으로 커져갔다. 이제 그럴만한 일은 없어졌지만, 아내의  또 다른 요인들이 갈등요인으로 쌓여가고 있다. 현재 아버지의 사는 모습이 기대치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 때문이다. 아버지가 쏟아낸 불편했던 말들로 미루어 본다면, 훨씬 깔끔하고 정갈하게 사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 걸러 근무하는 중에 벼르고 별러 아버지를 만나고 온 기분이 씁쓸하다. 새로운 갈등 요인이 해소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한동안 지속될 듯하다. 아버지가 혼자만의 성(城)을 열고 나와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요지부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내의 순정을 기대하기에는 팬 골이 너무 깊다. 아버지가 불우한 과거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던 모습과, 헤어질 때 보았던 '쓸쓸한 뒷모습'의 잔영이 계속 겹쳐 보인다. 어릴 때부터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성격이 강해져서 유발되는 것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잘 아는 나는 이런 상황이 안타깝다. 더 늦기 전에 아버지 웃는 모습을 보며, 손자들 모두와 함께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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