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티기 Dec 26. 2023

품격 있는 나이 듦에 대하여

아침에 퇴근하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전철역에 있는 거울이라 지나면서 언뜻 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자세히 볼 수도 있었지만, 뻔히 초췌할 모습을 오래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작업복 같은 옷에 후줄근한 배낭까지 매고 있었고, 전날 몇 개의 공사현장을 쫓아다니느라 피곤한 데다가 잠까지 설쳤다. 안 봐도 비디오라 거울 앞에 오래 서서 볼 염치가 없었다. 거울을 스쳐가며 잠깐 본 옆모습은 다른 사람 같았다. 얼굴은 거무스름한 데다 등은 구부정하고 통 넓은 바지가 신발을 덮어 추레하게 보였다. 분명 즐기면서 하겠다고 시작한 일인데, 거울에는 영락없이 생업에 찌든 중늙은이가 서있었다.


집 근처 전철역에 내려 버스로 환승하기 위해 정류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본 볼품없는 마을 버스정류장은 한산했다. 한 남자만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풍모가 예사롭지 않았다. 나이는 나 보다 네다섯 살 정도는 많은 듯했다. 큰 사각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는 있었지만, 스트레이트 핏 청바지에 윤기가 살아있는 구두 그리고 은은한 재킷에 목도리가 맵시 있게 보였다. 화룡점정은 머리에 얹기만 한 듯한 중절모였다. 굳이 제 나이를 감추려고 애쓰지 않은 중후한 멋을 풍겼다. 휴일 이른 시간에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걸 보면, 나와 비슷한 동선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편한 것만 고집하여 거무스레 맞춰 입은 나는 선뜻 그 사람 곁에 갈 수 없었다.


길을 가다 외모를 잘 가꾼 중년을 본 적은 많았지만, 이번처럼 큰 감흥을 받지는 않았다. 하필 그 시간대에 나이도 연상인 듯한 중절모 남자와 비교하면서, 갑자기 나의 무심함이 한심하게 보였던 것 같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단순히 젊게 보이려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피부에 주름이 깊어지고 머리숱이 휑한 것은 나이 듦의 상징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은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다만 나이에 걸맞은 멋 부림은 누구나 추구할 수 있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나이 들면서 갖게 되는 귀차니즘과 게으르니즘 만 극복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품격 있는 나이 듦의 첫걸음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나잇값 좀 해라.'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나잇값은 '나이에 걸맞은 말과 행동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이에 걸맞은 말과 행동을 하지 못했을 때 들었던 말인 것이다. 나는 그 나이에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온전히 하고 있느냐가 기본적인 기준이라 생각한다. 조금 더 성숙해진다면 사고의 기준이 자기중심적이냐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느냐로 옮겨간다. 나잇살 먹은 사람이 타인을 무시하고 자기 이익만 좇는 행동을 보이면, 그것처럼 꼴불견이 없다.


어른! 이 말도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어른은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나는 단순히 나이만 먹으면 어른이 된다고 여기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감에 걸맞은 그 무언가가 있어야 그때서야 어른이 되었다고 본다. 나이와 어른의 상관관계는 높지만, 나이 든다는 것 자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주변에 어른은 대게 두 종류로 대별된다. 하나는 나이만 많은 어른, 또 하나는 나이가 들수록 멋있어지는 어른이다. 멋있어지는 어른이 되기 위한 조건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우선 '배려'가 있어야 된다. '배려' 즉, '타인의 관점을 수용하는 능력'은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한 첩경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나잇값 제대로 못하는 나이만 먹은 어른을 '꼰대'라고 한다. 이 꼰대들이 필수적으로 나타내는 성향은 자기중심적 사고이다. 그래서 타인의 관점을 수용하는 능력과 배려가 메말라있다. 요즘 들어 내가 나잇값 제대로 하는 진정한 어른이 되지 못하고, 꼰대 짓을 한 적은 없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 그래서 생각에 그치지 않고 나잇값과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무엇이든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얼마 전, 전철에서 임산부석 주위에 귤껍질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금방 눈에 띄었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마침 내릴 때도 되어 귤껍질을 모두 주워서 내리고, 근처 휴지통에 버렸다. 한적한 곳에서 그런 일을 한 적은 더러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결행한 것은 처음이었다. 품격 있게 나이 들기 위해 몸으로 실천한 첫행보라 여기고 싶다.


품격이 있다는 것은, 나이 든 사람으로서의 성품과 품위를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듯 품격 있게 나이 들기 위해서 해야 할 것들은 부지기수다. 하지만 난 우선 이 두 가지부터 시작해 보련다. 처음부터 욕심내서 중도에 흐지부지 되지 않기 위해서다. 품격 있게 나이 든 롤 모델도 만나고 싶다. 일단 주위의 지인들 중에서 찾아보고, 아니면 새로 사귀는 과감함도 시도해 볼 예정이다. 그래서 롤 모델을 통해 품격 있는 나이 듦의 지평을 넓혀 가고자 한다.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