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고 싶어 뛰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하루키가 말한다. 꾸준히 달리는 사람들은 오래 살고 싶어서라기 보다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 온전한 인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일 거라고. 그는 온전한 생을 위해 뛴다고 말하지만, 나는 뛰는 동안의 온전함에 대해 생각한다. 뜀박질을 해 나가는 마음을 헤아려 본다. 스스로 결정한 어떤 순간이나 행위에 최선을 다하는 기분을 짐작해본다.
아직 어렸던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에 왜들 그렇게 열심히인지에 대해 오랫동안 궁금해했다. 특히 운동경기를 하면서, 보면서 자주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질 것 같아서 라는 비겁한 마음이 절반, 이기는 마음도 왠지 편하지 않은 마음도 절반. 뭘 하든 이기고 지는 느낌이 유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배구 관람을 좋아하는 친구도 잘 이해가지 않았다. 월드컵 4강에 한국팀을 보며 환호했지만, 나는 그때뿐이었다. 그냥 네트 위로 공을 넘기고, 골대에 넣는 공놀이일 뿐 아닌가. 그즈음에는 80년대 우민화 정책 중 하나로 프로스포츠가 생겼다는 얘기를 들은 일도 내가 '경기'에 무관심하게 된 이유에 한몫했다. 나는 그렇게 사리분별을 할 줄 안다고 여긴 시절까지도 열심히 하는 것,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은, 너무 당연해서 진부한 문장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야 답을 찾는다. 최선을 다하는 일, 그러니까 어떤 일에 몰입하는 과정을 통해 얻는 성취가 달콤하다는 것을.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과정을 겪는 동안 살아있는 나를 느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달리는 일도 스포츠 경기를 뛰는 일도, 어쩌면 그들은 나는 절대 알 수 없던 세계에서 온몸을 적시고 황홀해하는 과정은 아니었을까. 나는 온전히 그랬던 적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양 눈썹 사이에 단단한 주름이 잡힌다. 입술이 꾹 다물어진다.
여전히 언제 문밖으로 나가 달리기를 시작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아마 나는 영영 달리기를 시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방 한구석에 있는 닌텐도를 꺼내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 설렁설렁 달리는 일로 대신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뭐 어떤가. 달리기가 아니더라도 인생에 적어도 몇 번은 온전히 나로 존재하며 살아가고 싶다. 달리기는 언젠가 방법을 잘 모르겠을 때의 보루로 남겨두면 되는 일이다.
카모 강변 벤치에 앉아 넋을 놓고 있다 보면, 운동복을 입고 총총총 달리는 사람들이 몇 번이나 스쳐 지난다. 여전히 완전히는 이해할 수 없는 자발적 달리기. 그 의미나 가치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무엇보다도 하루키가 달리기로 이뤄낸 "뱃살 걱정 없이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멋진 노년*”이 욕심난다. 달리기가 끝난 후 들이키는 생맥주에 대해 생각한다. 더 많이 탐나게 되는 날 나는 눈 꼭 감고 달리기 시작하게 되지 않을까.
*한수희,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