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 수집함 비우기 #1 : 아이데이션의 날
분명히 기억난다. 투명한 상자 안에 목이 댕강 잘린 머리. 그리고 그 앞에선 남자가 대화하는 모습이. 초등학교 시절 도서관에 본 공상과학책의 한 장면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첫 도서관의 기억이다. 두 번째는 중학교 시절 점심시간에 도서관에 가던 내 모습이었고, 아마 나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책을 즐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고백하자면, 공부에도 큰 관심이 없는, 시간이 많은 아이였다. 교과서는 너무 따분하고 딱히 할 일은 없었다. 친구들과 노는 것도 좋았지만, 혼자서 노는 법은 잘 몰랐기 때문이 선택한 것이 책이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서도 심심하면 도서관이나 서점을 찾아다녔고, 나는 스스로 독서를 꽤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읽지 않고 쌓여가는 책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여유가 있을 때는 큰 서점에서 새 책을, 궁핍할 때는 중고 서점에 들러 몇 권씩 샀다. 시시때때로 관심분야의 책을 가져와 책장에 꽂아두자, 이사할 즈음이 되자 책은 점점 짐덩어리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좋아한 것은 책 읽기가 아니라 책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조금 변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책을 가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독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독서하는 습관을 들여보기로 한 것이다. 어느 웹사이트에 30간 매일 책 읽기 챌린지가 눈에 띄었다. 우선 30일간, 매일 적어도 두 페이지 읽기를 목표로 사진을 찍어 매일 웹사이트에 올리기 시작했다.
30일이 지나자 나는 정말로 '매일 책을 읽는 인간'이 되어있었다. 새로운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 21일이 필요하다는 '21일의 법칙'도 있지 않던가. 21일의 법칙은 정말이었다. 특별히 독서시간을 계획하지 않았음에도, 틈틈이 읽은 책은 그사이 4권이나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인증사진을 찍거나 독서에 괜히 신경 쓰지 않아도 꾸준히 책 읽는 사람이 되었다는 일종의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계절의 변화를 겨우 알아채고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 달에 한 권은커녕, 지난 몇 달간 단 한 줄도 읽지 않은 것이다. 아니, 대체 뭐가 문제지?
당신의 손에 새로 쥐어진 아이디어노트는 이제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저절로 풍요로운 마음이 든다. 아이디어가 가득 쌓인 노트는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게 될 것이다. 나는 새 학기가 되거나 일기장을 한 권 다 썼을 때, 새 노트를 마련하며 왠지 흥미진진해지곤 했다. 정성스럽게 이름을 쓰는 나만의 작은 의식을 치르거나 어떤 시절 - 아마도 감수성이 풍부했던 사춘기시절 - 에는 노트마다 이름도 붙여주기도 했다. 당신도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새 아이디어 노트를 마련했을지 모르겠다.
시시때때로 아이디어 수집함을 펼쳐 들여다보면,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거나 빈약해 보이던 아이디어에 덧붙이고 싶은 아이디어가 마구 생각나 글을 덧붙이고, 더 나아가 바로 실행에 옮겨보는 일은 지루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아이디어노트를 만든 직후에는 더 자주 아이디어 수집함을 들여다보며, 더 많은 아이디어블록을 더 빠르게 만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아이디어블록 만들기에 몰입하다 보면, 노트 자체를 잊고 사는 틈이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우리는 아이디어노트에 적힌 '해보고 싶은 일들'말고도 더 중요하고 바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아이디어노트의 존재 자체를 잊고 사는 틈이 찾아오는 것이다. 내가 단 한 줄도 읽지 않고 흘려보냈던 몇 개월의 시간 같은 틈 말이다. 이 말은 멋진 일을 상상하고, 시도해볼 기회가 사라 없어진다는 뜻이고, 지루한 일상에 생기를 되찾을 기회를 잃는 것과도 같은 말이기도 하다. 낙심하지는 말길 바란다. 당신의 눈을 반짝이게 하던 그 일들, 중요하지만 긴급하지 않아서 미뤄뒀던 그 일들을 잊지 않는 명확한 해결방법이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의식적으로 아이디어 노트를 들춰보는 것뿐이다. 일주일에 한 번, 혹은 격주로, 혹은 한 달에 한 번 나만의 아이디어 데이를 정하기만 하면 된다. 아이디어 데이를 정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디어를 훑어보는 일로 시작해 나만의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기획하고, 실행하거나 시도해본 아이디어들을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셈이다.
자, 아이디어데이가 밝았다. 아이디어데이에 우리가 처음으로 할 일은 아이디어 수집함을 비우는 일이다. 시시때때로 쌓아둔 블록을 훑어보며 '이거 지금 해볼까?' 같은 결의가 생기면 시도하고, 지금 보니 지나치게 형편없는 것은 버리는 것이다. 아이디어가 정말 너무 많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한 달에 한 번으로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내 개인적인 아이디어데이는 매주 토요일이었는데, 중요하다고 판단된 아이디어들을 깊이 기획하고, 실행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간격을 늘렸다. 반대로 아이디어가 너무 많다고 여겨지면 아이디어데이의 간격을 줄이는것이로 쉽게 해결된다.
당신이 아이디어데이에 첫 번째로 해야 할 것은 그동안 모아둔 아이디어 블록을 훑어보며 수집함을 비우는 일이다. 지금까지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를 다루는 방법 중 하나인 '아이디어 수집함'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다. 그동안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아이디어 수집함을 만든다
2. 시시때때로 아이디어 블록을 쌓는다
3. 아이데이션의 날을 정한다
4. 아이디어 수집함을 훑어본다
그래서 뭘 하라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굳어진 표정을 풀고 다음 글을 읽어보자. 이제부터 아이디어 수집함을 어떻게 비워내야 하는지, 아이데이션의 날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구체적인 방법을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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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 수집함 만들기 #1 : 섬광 같은 아이디어가 내 일상을 스칠 때
아이디어 수집함 만들기 #2 : 당신의 뇌는 최적화를 원하지 않는다
아이디어 수집함 만들기 #3 : 아이디어 수집함 만들기
아이디어 수집함 만들기 #4 : 아이디어 수집에 관한 규칙
✔︎ 현재 글
아이디어 수집함 비우기 #1 : 아이데이션의 날 - 두 눈을 반짝이게 했던 아이디어, 잃어버리지 않는 법
✔︎ 이어지는 글 예고
아이디어 수집함 비우기 #2 : 샷 아이디어 vs 프로젝트 아이디어 - 한입에 먹을까, 쪼개 먹을까
아이디어 수집함 비우기 #3 : 프로젝트 아이디어 살 찌우기
아이디어 수집함 비우기 #4 : 애매한 아이디어 처리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