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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트바스 Dec 16. 2021

생존 가방을 꾸리자

어느 아침, 다급히 부르는 그 애의 목소리에 잠이 깼다. 샤워하던 그 애가 갑자기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며 나를 부른 것이다. 정전이다.  


정전이라니. 10대의 어느 무렵 무터 한동안은 내가 사는 집이 정전되는 상황은 전혀 상상 본 일이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 한 두 번쯤 경험해본 것이 전부였는데 그 시절의 정전은 꽤 흔한 일이었는지, 우리 집은 물론이고 집집마다 하얗고 두꺼운 양초가 있던 기억이 난다. 몇 년 전 제주에 큰 태풍이 휩쓸고 간 다음날, 몇몇 마을이 정전과 단수로 고생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특별한 재해가 아니고서야 이 시대에 아무 일도 없이 전기가 안 들어올 리 없지 않은가.


일본으로 이사한 지 1년 6개월 만에 벌써 두 번째 정전이다. 한 번은 비슷한 위치의 콘센트에 오븐과 코타츠, 전기 플레이트를 연결해 썼는데, 과부하였을까?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전기가 차단됐다. 두꺼비집을 열어 스위치를 올리자 금세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또 한 번은 우왕좌왕하는 사이 금세 형광등 불이 들어와 별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말았었다. 이번에도 별거 아니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전기회사에는 한 시간째 전화를 걸어도 연결되지 않는다. 


슬며시 빈 빨래통으로 시선을 옮겼다. 밀린 빨래를 해놓길 잘했다. 외출할 일 없다는 핑계로 전날 머리 감지 않은 것에 대해 반성이 밀려왔다. 찬물로 머리 감는 건 왠지 찜찜해서(너무 차갑기도 하고) 늘 따뜻한 물을 고 집하 지는데, 오늘은 어쩔 수가 없을 것 같다. 그 애가 고백을 시작한다. 가스비를 내지 않아 전기가 끊긴 걸지도 모른 댔다. 집 앞 신호등 불빛이 여전한데 우리 집만 그런 것을 보고 나서였다. 온갖 고지서와 세금 같은 문제들은 일본어가 익숙한 그 애의 역할이었는데, 자신이 소홀함을 이제야 진술하는 것이다. 전기가 끊기면 가스도 사용할 수 없는 구조고, 가스가 없으면 따뜻한 물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진짜 이유가 어찌 됐든 잔소리는 뒤로하고, 일단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캠핑용 가스버너를 사 둔 게 생각났다. 지난겨울, 봄이 오면 캠핑을 가자고 산 것인데 한여름이 오는 동안 꺼낸 적 없던 새 거였다. 캠핑이 아니면 특별히 쓸모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거라면 커피를 내려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잠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직 가지 못한 캠핑의 분위기를 이렇게라도 내볼까 하는 심산이었다. 부탄가스를 가져와 버너를 켜고 스테인리스 주전자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물이 끓는 동안 작은 프라이팬도 챙겨 식빵을 구웠다. 정전이 되어도 맛있군. 


아침식사를 끝낸 후에서야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진에 민감하지 못한 우리가 까맣게 모르는 새에 혹시 지진이 난 것은 아닐까. 지진이 나면 일단 전기도 가스도 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거 같은데. 한국에 살 때는 지진은 먼 이야기 인 줄만 알았는데, 1년 전 즈음 건물이 슬쩍슬쩍 흔들리는 지진을 경험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지진이 잦아서 미처 체감하지 못하고 뉴스를 통해 알게 되는 일도 다반사다. 대체로 내가 사는 관서지방(오사카나 교토 근처)은 관동지방(도쿄 근처)에 비해 그 빈도도 적고 진도도 약한 편이라 조금은 안심이지만, 재난은 특별한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안다. 나쁜 일은 대비하지 않고 있을 때 가장 치명상을 남긴다는 것도.  


"우리도 생존 가방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농담조 가득한 내 말에 그 애도 그게 정말 필요하냐며 웃어넘긴다. 며칠 전에도 도쿄 쪽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건물이 흔들릴 만큼 지진이 나면 어디로 대피해야 할까 잠깐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그날이 다가온 걸까. 20년도 전에, 그러니까 초등학교 다닐 적에 배운 적이 있었다. 지진이 나면 공터로 이동해야 한댔는데, 그렇다면 우리도 주변 공원으로 달려가야 할 것이다. 생존 가방은 아직이니 노트북 정도를 들쳐 메고 가면 될까. 다른 건 몰라도 글이며 사진이며 온갖 기록들이 저장되어 있는 노트북이 없어지는 상상은 정말 하기도 싫기 때문이다. 급박한 상황에서 별로 소중한 건 없구나 하는 결론에 이른다. 애지중지하던 옷이나 문구 같은 것은 애초에 가지고 나갈 후보에 조차 오르지 못했으니까.


일본은 집집마다 지진대피용 생존배낭을 하나씩 구비해 둔다고 한다. 특히 어린아이가 있는 집이면 필수적으로 준비하고, 회사차원에서는 신입사원에게 선물로 주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생존 가방에는 저장기간이 긴 식품과 생필품을 챙겨두는데, 보존기한이 다가오면 조금씩 집에서 소비하고 새 상품을 채워 넣는 식이다. 아예 생존 가방 키트를 판매하기도 한다. 내게는 낯설지만 일본에서 지진이란 그만큼 일상생활 가까이에 있다는 뜻일까. 생존 가방을 핑계로 전부터 찜해둔 새 배낭을 사고 싶지만, 일단은 미뤄두고 오래된 분홍색 여행가방에 생존 물품을 채워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제 내게도 그리 먼 이야기로 들리지만은 않으니까. 물론 한국에서도 전혀 쓸데없는 것은 아닐 테고 말이다. 









<재해 대비 및 비상시 대피 요령>

1. 가구는 고정시켜두고, 쓰러졌을 경우 출입구를 막지 않도록 배치할 것.

2. 손이 닿는 곳에 손전등과 호루라기를 둘 것

3. 여진이 의심되는 경우 욕조에 물을 받아둘 것(생활용 수로 사용하기 위해)

4. 피난처로 가게 될 것을 대비한 생존 가방을 꾸려둘 것

5. 피난 경로를 미리 알아둘 것



<생존 가방 물품 리스트>

1. 3일 분량의 물과 비상식량

2. 비상시 유용하게 사용될 손전등과 라디오, 라이터, 칼, 장갑, 호루라기, 양초, 장갑, 헬멧

3. 생필품과 구급약품

4. 신분증, 의료보험 카드, 여권, 도장, 통장, 현금(동전 포함), 운전면허증 등의 귀중품 주머니

5. 속옷, 의류, 담요, 수건








끈질긴 전기회사와의 통화시도 끝에, 그날 정전사태의 원인은 '전기요금미납'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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