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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트바스 Dec 01. 2021

후지산과 만년설

"이거 봐 봐. 우리 여기 가자."


그 애에게 눈 쌓인 산이 멋지게 펼쳐진 캠핑장 사진을 건넸다.


"여름에도 눈이 있어?"

"그럼! 이거 만년설 이잖아"

"정말? 그럼 지금 가도 눈 볼 수 있는 거야?"


그렇게 우리는 첫 캠핑장소로 후지산 인근의 후모톳바라로 정했다. 미리 적어둔다. 여름의 후지산에는 눈이 없다. 한여름에 눈 쌓인 산이 있을 리 없었다. 북쪽 나라 어딘가 혹은 아주 더 높은 산이어야 했다. 봄이나 가을이면 모를까. 한여름은 무리였나 보다. 나는 여름의 후지산을 미처 몰랐다. 내가 본 거의 모든 후지산 풍경에는 눈이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한여름의 눈 구경과 첫 캠핑의 설렘으로 나는 들떠있었다. 같이 살지 않을 때는 데이트를 핑계로 여행을 갈 기회가 많았지만, 우리는 동거인이 되자 아주 큰 맘먹지 않고서는 어딘가로 떠나기가 꽤 어려워졌다. 만날 사람은 집안에 있고, 집은 꽤나 안락해서다. 이런 이유는 그 애에게 특히 영향을 미쳤는데, 어디라도 가고 싶은 나는 종종 그 애의 마음을 부추기는 일에 힘써야 했다.






아주 오랜만에 결심한, 아니 일본에 온 뒤로 처음 계획한 여행은 겨울의 홋카이도였다. 적어도 계획은 그랬다. 작년 겨울부터 그 애의 오키나와와 나의 홋카이도를 경합에 붙인 결과였다. 눈 쌓인 삿포로가 어지간히도 궁금했는데, 감염병이 점점 심해지고,  어영부영하는 사이 겨울은 다 가고 없었다. 어느새 온 여름에 다시 여행을 떠나기로 정했다. 2차 경합이었다. 아직 다 가지 않은 여름이 너무 버거워 더 뜨거운 곳으로 갈 용기가 없는 우리는 다시 홋카이도행을 결정했다. 라벤더 향이 가득할 것만 같은 그곳을 상상했다. 


여행을 2주 앞둔 날이었다. 일본의 코로나 확진자수는 역대 최고로 늘어나고, 교토역시 사상 최고치를 경신중이었다. 아무래도 비행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그 애의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쩐지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조금 심통이 났다. 제길!


대체지로 찾아낸 곳이 비교적 안전하게 자가용으로 갈 수 있는 시즈오카였다. 후지산을 볼 수 있는 캠핑장을 찾아 가보기로 한 것이다. 자가용을 타고 움직일 때마다, 기차 노선도를 둘러볼 때마다 느낀다. 일본은 생각보다 아주 크다. 일북의 북쪽 섬인 홋카이도만 해도 남한보다 조금 작은 수준(약 84%)이다. 지도상으로는 그리 멀지 않아 보였던 교토에서 시즈오카까지도 5시간 남짓인데, 서울에서 가장 먼 곳으로 치는 부산까지의 거리와 비슷했다. 


시즈오카 중에서도 목적지는 후모톳바라 캠핑장. 거리상 2박 3일의 일정이지만, 일단 하루만 예약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후모톳바라 캠핑장은 후지산이 보이는 캠핑장 중에서도 경관이 좋아 사랑받고 있는데, 매해 캠핑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아침 일찍 출발한 것 같은데, 도착하니 벌써 해가 저만치 지는 중이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텐트를 쳐야 했다. 대충 정리를 마치고 그제야 주위를 둘러본다. 


산지여서일까. 겨울이 되면 바람이 매섭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여름이 오는 동안 바람은 전부 사라져 버린 듯했다. 구름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천천히 흘렀다. 그 뒤로 가려져 있던 후지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도착해 후지산이라 여겼던 것은 반대편의 다른 산이었다. 구름이 걷힌 하늘에는 별이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했다. 완전히 드러난 산은, 그리고 그 산에 둘러싸여 두 발을 디딘 이곳은 내가 아는 세상이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장관이 또 있을까. 전에 상상하던 설산은 아니었지만, 사진으로 전부 담아낼 수도 없었지만, 이것으로 충분했다. 


집에서 준비해온 채소 꼬지와 겨우 구한 고기 몇 점, 그리고 한국에서 공수한 쫀드기 몇 개로 밤을 보냈다. 맥주도 빼놓지 않았다. 베개 대신 챙겨 온 담요가 성에 안차 밤새 푹 잠들 수는 없는 밤이었지만, 전기 없는 그 밤은 더없이 여유롭고, 한적했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눈을 떴다. 텐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새벽의 찬기가득한 숲 내음이 단번에 느껴졌다. 언젠가 새벽 공기가 건강에 나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는데, 이런 내음의 공기라면 건강에 나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낯설고 먼 새소리들, 서서히 걷히는 안개. 그 고요 속에서 만난 몇 년만의 일출이 반가웠다. 


마침 원하는 날, 지평선 혹은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꽤 운과 연관되어 있다. 그날의 나는 운이 좋았다. 벌써 밝아진지 한참이나 지난 후였지만, 뒤늦게 능선 위로 해가 쏙 떠올랐다. 나는 뜨는 해를 마주 보며 신중하게 물을 끓이고, 커피콩을 갈았다. 이미 갈아둔 원두를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커피콩을 선택했다. 언젠가는 생두를 가져와 양껏 볶아내는 상상도 하면서.  


영 미덥지 못했던 일회용 아이스박스는 용케도 지난밤 넣어둔 얼음을 살려두었다. 덕분에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영광을 누렸다. 그 맛은 벌써 잊었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영영 잊히지 않을 것만 같다. 새 봄이 오면 다시 들러, 미처 즐기지 못한 설산도 구경하고, 아침 일찍 도착해 뜨끈한 온천까지 전부 즐기고 오리라. 커피 한 잔을 전부 마시고 나자 그 애는 텐트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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