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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트바스 Oct 19. 2021

이러려고 교토에 온건 아닌데

교토에 온 후로 종종 멍하고 무기력한 나 자신을 목격하게 된다. 종종 미국 유학생의 아내들이 우울증에 걸린다더라 하는 말들을 들을 때면 그럴 수 있지, 하고 이해하면서도 믿고 싶지 않았다. 얼마 전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국제결혼을 한 부부가 나왔다. 남편은 한국사람, 아내는 베트남 사람인데 한국에 산다고 했다. 아내가 고국이 아닌 나라, 한국생활에서의 고민을 털어놓는 장면을 보니 나도 다를 것 없는 처지라는 생각이 훅 들었다. "나도 저 사람 같은 기분이야! 동남아에서 시집온 사람!" 그 애는 낄낄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이국의 탓만은 아닌 것을 안다. 매일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고 외쳤는데, 외치는 만큼 몸은 반항한다. 사람은 어찌나 간사한지, 작은 것으로 상처 받고, 한 마디로 온종일 우울해지고, 가끔은 찰나의 기쁨으로 평생을 산다. 이런 마음도 저런 마음도 쉬이 지나갈 것을 알면서,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니었음을 깨달을 거면서도 이리저리 휘청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아직 휘청이지 않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 제목이 떠올랐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간사한 인간으로서,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이제 그만 흔들리고 싶다. 


시간도 많고, (당장은) 밥 굶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나를 더 괴롭게 한다. 이런 말을 뱉어내면 혹시 누군가 배부른 소리 한다고 말할까 두렵다. 우울한 표정이라도 지으면, 이렇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저렇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가시 달린 조언을 전해 들을까 두렵다. 요즘의 나는 먼 미래를 위해 애쓰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아 무력하다. 매일 뭔가를 하면서도 가치 없다고 느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내가 보내고 있는 시간이, 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따지지 않은 채로 땀 흘리던 때가 언제였더라. 그런 때가 유난히 그리워진다. 


외출 준비를 하면서 마주한 거울 속 내 얼굴에는 붉은 뾰루지가 듬성이 나 있었다. 마스크 때문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몸 곳곳에도 붉은 반점이 생겨 나를 간질이곤 했다. 이건 가을이 왔기 때문일까? 새 자전거를 타고 3킬로미터 쯤 달리자 색이 다 바래버린 벚나무 잎이 휘날렸다. 가을비도 똑똑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우산이 유난히 빛나 보이는 날은 어김없이 비가 온다. 그리고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빛나던 우산을 떠올리곤 한다. 자전거 페달을 좀 더 세차게 밟았다. 


자전거는 정확히 세 번째 중고자전거다. 교토의 대중교통은 편리함과 거리가 멀고 비싸기도 해서 자전거가 필수다. 2년 전 쯤, 낡은 중고 자전거 두 대를 사다가 그 애와 둘이서 한동안 타고 다녔다. 안장도 바퀴도 작은 접이식 자전거였다. 뭔가를 살 때 한국에 들고가기 쉽도록 왠만한 것은 전부 접히거나 작은 것으로 고르는데(실제로 가져가게 될지 아닐지도 모르면서 늘 고려하게 된다), 이게 익숙할 때도 되었건만 10분 즈음 타면 내 엉덩이는 어김없이 아파서 움찔댄다. 10분 보다 먼 거리는 차라리 걷거나 버스를 타곤 했다. 동네 오토바이 가게를 지날 때마다 언젠가는 오토바이를 사면 어떻냐고 이야기했는데, 얼마 전 마침 그 애의 친구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다며 전기자전거가 필요하냐고 물어왔다. 오토바이 대신 그 전기자전거를 사는 것으로 합의 보고, 마침내 크고 안락한 안장 위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전기의 힘을 빌릴 수 있게 된 것은 덤이었다. 이제 한동안은 버스비를 아낄 수 있게 되었다.


교토에서 오래되었기로 유명한 빵가게인 신신도(進々堂)에 다다랐다. 그 시작을 찾으면 무려 100년이 넘는다. 일본의 오래된 가게들을 생각하면 멋지다고 느끼면서도, 한국의 오래된 것들을 모조리 없애버리려 했다는 생각에 종종 미운 마음이 들곤하낟. 미운 마음이야 어찌 됐든, 일본의 가게들은 오래된 만큼 자주 대를 이어 지켜지는 것 같다. 골목길을 걷다 보면 재미있는 가게들을 목격한다. 단일품목을 파는 가게들인데, 이를테면 모자만을 파는 모자가게, 지팡이만 파는 지팡이 가게, 우산만 파는 우산가게 같은 곳들이다. 나는 한국에서 오직 한 가지만 파는 그런 가게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가게들을 지날 때마다 장사가 잘 되려나 자주 걱정이 든다. 대체로 규모가 작고 소박하기 때문이다. 혹시 대를 이은 아주 오래된 가게들이라서 장사가 잘 되는 것은 둘째고, 우선은 전통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오래된 가게에서 파는 것들은 품질이 나쁘기 어렵다. 신신도의 빵도 마찬가지. 오래된 가게는 처음이라도 믿고 찾을 수 있게 된다. 처음 신신도에 들르게 된 것도 그저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신신도는 교토 곳곳에 존재하지만 나는 기타야마점을 좋아한다. 중심가와 떨어진 동네라 붐비지 않고 쾌적하다. 당연히 빵맛도 좋다. 그래서 나만의 근무지로 정하고 종종 찾았다. 점심으로 아이스커피 한 잔과 원하는 빵 한두 개를 골라 먹는데 이것저것 맛보는 재미가 있어 즐겁다. 버스를 타고서도 한참을 걸어야 하는 것이 단점이지만, 이제 새 자전거가 생겼으니 더 이상은 문제없이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무력한 마음은 일단 두고, 일단은 자전거를 핑계 삼아 성실히 온몸을 움직여 보기로 했다. 난생처음 타는 전기자전거는 오토바이와 영 다르다. 팔목만 슬쩍 돌리면 쌩 하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전기자전거도 페달을 열심히 굴러야 앞으로 나아간다. 가치 판단은 억지로라도 멈춰보고 싶어 진다. 지나치게 효율과 가성비만을 따지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산건 아니었을까. 너무 잘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거라고 결론지었다. 사실은 몇 번이나 같은 결론을 낸 문제였다. 더 깔끔하고 정확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으니 아직은 다른 도리가 없어보인다. 일단은 자전거 바퀴 구르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해 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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