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애써 고르지 않아도 손해는 없다

작은 책방의 좋은 점에 대하여

by 에트바스

그 뜻은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는 인도 음악이 흐른다. 가끔은 겨우 영어라고 가늠되는 노래도 들려온다. 뜨끈한 짜이가, 이 알 수 없는 음악들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애써 고르지 않아도 손해가 없으리라 믿음 가득한 책에 둘러싸여 안정되게 만드는 곳. 이곳은 제주의 작은 책방, 바라나시 책 골목이다.


이름조차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엄밀히 말하자면 책을 파는 서점보다는 비치된 책을 읽는 공간인 북카페에 가까운데, 책방도 서점도 북카페도 아닌 책 골목이다. 인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바라나시'는 생소한 단어일 것이다. 작은 책방답게 매일은 아니지만, 종종 찾을 때마다 책장의 구성을 조금씩 바뀌는데, 새로 들여온 책인지 아닌지 그런 건 알 수 없지만 덕분에 같은 자리에 앉아도 질리지가 않는다.


제주에서 막 출간되는 신간도서를 구경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이 없기 때문이다. 시내, 그러니까 제주시나 서귀포시 중심가에 가면 꽤 큼직한 서점이 있지만, 신간이 부지런히 들어오지 않아 책 구경하는 재미가 별로다. 사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금세 집으로 배송되지만, 두 손에 쥐고 만지고 책장을 넘겨볼 수 없다는 사실에 가끔은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큰 서점에서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눈치 볼 것 없이 이 책, 저 책 둘러보는 시간을 상상하면서.


나는 이 작은 책방을 만난 후로 꽤 마음이 느긋해졌다. 교보문고 가고 싶다! 하는 아쉬운 마음은 잊을 만큼 줄어들었다. 이곳의 좋은 점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워 우물쭈물할 것이다.






매일 쏟아지는 책 중에 좋은 책을 고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슨 책을 살지 정하지 않고 서점에 들어서는 사람이라면, 그 무수히 많은 책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제목이 눈에 익거나 표지가 예쁜 책, 제목이 한눈에 들어오는 책을 고르게 되어있다. 당연하게도 서서 전부 읽어볼 수 없기 때문이다. 대형서점 *평대의 책들은 '서점의 추천'이 아니라 ‘돈의 추천’이 된 지 이미 오래되었고, 인터넷 서점의 전면에 등장하는 책들도 비슷한 처지다. 알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큼직한 광고판에 눈길이 가는 건 별다른 방법이 없다. 이건 다른 말로 하자면 자본을 등에 업은 신간들 틈새에서 우리는 정말로 원하는 책 혹은 양질의 책을 잘 골라내기 힘들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긴, 광고대에 오르는 책들도 분명 좋은 책으로 출판사에 눈에 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이렇게 눈에 띄기에 안성맞춤인 곳에 자리하고 있는 거겠지? 하고 위안삼아 보기도 한다.


*대형 서점에서 책 표지가 보이게 놓인 곳을 평대라 부르고, 책등만 보이게 꽂혀진 곳을 서가라 부른다.


오래전, 독서에 관한 강의를 하며 좋은 책 고르는 법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기억나는 것은 오랫동안 사랑받은 스테디셀러 리스트나 책 뒷면의 추천사를 참고하라 같은 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추천사도 온전히 믿을 수 없으니, 좋은 책 고르기에 좀 아쉬운 방법인 것 같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한 가지 방법을 더 전할 것이다. 바로 동네 작은 책방을 찾는 것이다. 대형서점의 진입으로 동네마다 있던 책방은 조금씩 사라졌지만, 요즘 유행처럼 동네서점이 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책방들이 말이다. 작은 책방들은 작은 것을 무기 삼아 큰 서점과는 다른 방식으로 책을 소개한다.


타인에게 마음에 쏙 드는 책을 추천받는다는 게 사실 쉬운 일만은 아니다. 음식취향이 다른 것처럼 독서취향도 사람에 따라 다르고, 필요한 책도 다르니까. 추천하기도 추천받기도 어려운 게 바로 책 선물이 아닐까 싶다. 그런 부분에서 작은 책방은 여과 없이 힘을 발휘한다. 집에 가서 읽어보면 혹시 실망할까 우려하며 책을 골라야 하는 불안에서 벗어나게 된다.


작은 책방의 거의 모든 책은 책방 주인장이 읽었거나 읽지 못했더라도 신중하게 고른 책들일 것이다. 작은 책방의 주인장은 정성껏 고른 자신의 취향을 내어준다. 작은 책방에서는 주인장을 믿고 의심이나 실망의 여지없이 책을 집어 들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게다가 책방 주인이 나와 같은 취향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곳의 책들을 전부 읽어보고 싶을지도 모른다.






들어오면서 뜨거운 짜이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은 고작해야 네 개. 빽빽하게 앉아야 열 명 남짓이면 꽉 차는 카페지만, 내 엉덩이 붙일만한 자리는 늘 있다. 소근소근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음악 속에서 사람들은 책을 읽거나 책 속의 좋아하는 말들을 받아 적는다. 삼각형 쿠션에 몸을 기대고 책장을 살펴본다. <인간>, <권태>, <정신과 자연>, <백 년 동안의 고독>처럼 직관적인 제목의 책들이 눈에 띈다. 유행으로 치자면 요즘 잘 나가는 책 제목과는 거리가 멀지만, 난 이미 주인장이 꾸린 멋진 책들에 가득 둘러 쌓인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읽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좋은 책들과 이 공간을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에너지가 몸에 스며드는 것 같다.


전에는 겨우 제목만 알고 읽으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고전(데미안이나 동물농장 같은)을 더 주의 깊게, 의미 있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이런 경험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전국 각지에 작은 책방이 점점 많이 생겨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몇몇은 존재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조용히 짜이를 마시며 여전히 알 수 없는 음악을 듣는다. 내 앞에 있는 차받침과 쟁반은 태국에서 온 것이 틀림없다. 방콕을 여행할 때 몇 번이고 봤던 거였다. 여행 내내 눈에 띄었지만 나에게는 쓸모없는 것이라 여겨졌던 그 코끼리 쟁반이 이곳에서 보니 참으로 쓸모 있고 아름답다. 쓸모라는 건 지극히 상대적인 모양이다. 대형 서점에서는 잘 팔리지 않는 책들을 모아 창고에 두고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하지만, 작은 책방에서는 고르고 골라 소중히 여겨주고, 그 색이 바랜 책들도 보란 듯이 지금 필요한 문장들을 척척 내놓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사람들이 살기는 살되, 죽은 삶을 살고 있는 땅, 자기 삶에 대해 아무 용기도 없이 사는 땅

- (황무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신화의 힘>, 조지프 캠벨


내가 발 디딜 곳이 황무지 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헷갈리지만, 조금 더 주변을 둘러본다. 작은 메모지 뭉치와 연필, 색연필이 테이블과 책장 곳곳에 놓여있다. 마음에 드는 글귀가 보이면 적어가라는 주인장의 쪽지와 함께. 나는 누군가 써 놓은 메모를 훔치기로 했다. 세상 수많은 책 중에 좋은 것들을 모아둔 이 작은 책방에서, 작은 책방 이지만 족히 수백 권은 되어 보이는 그 많은 책들 속에서 좋은 이야기만 쏙 꺼내어 적어둔 사람들의 쪽지가 보석처럼 반짝인다. 직접 책을 꺼내 들어 읽지 않아도 보물 같은 글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그러니까 친절하지만, 적당히 무심한 이 작은 책방을 좋아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