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서야 확신이 든다
내 쓰기의 역사는 초등학교로부터 시작된다. 그건 아마 막 2학년이 되고나서 였을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담임선생님은 확인의 의미로 매일 도장을 쾅 찍어주셨는데, 글자를 예쁘게 쓰지 못하거나, 엉뚱한 내용을 썼다가는 어김없이 비참한 덧글을 받아야만 했다. 나는 누가 내 마음을 읽는 게 싫어서 하루 일과를 대강 둘러 썼다. 자주 날씨에 대해 썼고, 글감이 없는 날은 동시로 일기장 한 면을 때웠다. (짧게 끝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매일 쓰던 일기는 최초의 에세이였으나, 솔직하게 쓰는 방법에 대해서는 도통 배울 수가 없었다.
타인의 요구를 벗어나 자의적 글쓰기를 시작한 때로 거슬러 가보자. 지금 읽어보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도 없고, 부끄러워서 알고 싶지도 않은 싸이월드 일기장을 지나, 스물일곱 살 되던 해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쓰기 생활이 시작됐다. 매일 아침 카페로 달려가 글 쓰는 일은 사치라고 느껴질 만큼 행복했다.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열심히 자판을 두드려댔다. 독자는 오직 나뿐인 글을 썼다. 나는 내 마음을 정직하게 대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나는 그때 이런 문장을 남겼다.
나는 뭐든 쓰면서 괴로워하다가도, 금세 멀리서 나 자신을 지켜볼 수 있는 힘을 조금 얻게 되었다.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눈에 보이는 실체로 만들어내다 보면 어느샌가 괴로움은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어린 아이일 때부터 그렇게 일기를 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쓰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본다. 가수 요조는 칭찬받고 싶어서 쓴다고 말했다. 오은 시인은 스스로를 잘 알고 싶어서, 이 세계에서 어떤 존재로 거듭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쓴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쓰는가. 나도 나를 알고 싶어 쓴다. 거듭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어서 쓴다. 머릿속, 마음속 깊이에 어물쩍대는 말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쓴다. 조금 전까지의 나를 이해해보려고 쓰고, 앞으로의 내가 궁금해서 쓴다. 때때로 남의 말과 글을 가져다가 쓴다. 내 말로 위장하고 포장하며 쓴다.
어떻게 쓰는가 하면, 부지런하려고 애쓰면서 쓴다. 한정없이 미루고 꾸물대다 보면 단 한 글자도 흔쾌히 써낼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자주 집에서 쓰고, 가끔은 100년이 다 되어가는 낡은 카페에서, 이 자리에 앉았을 선인들을 상상하며 쓴다. 이따금씩 오른손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이 욱신대는 것을 알아채면서 쓴다. 그럴 땐 대체로 자판 두드리는 일을 멈춘다. 고통을 딛고서 쓸 만큼 글쓰기에 푹 빠져있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때면 새 자판을 사볼까 하며, '좋은 키보드'에 관해 오랫동안 검색하는 시간을 갖는다)
지금은 더운 바람을 맞으며 쓴다. 여름이 바짝 다가오고 있는 게 확실하다. 덥고 습한 건 아찔할 만큼 두렵지만, 한껏 땀 흘리면 뭐라도 열심히 한 것 같아 스스로를 기쁘게 하는 계절이다. 아침 청소를 빼먹은 날은 청소를 할까 글을 쓸까 고민하면서 쓴다. 해야 할 일 여러 개를 두고 보면 덜 하기 싫은 일을 먼저 선택하게 되어있다. 꼭 써야 할 글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그런 장치를 마련하곤 한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건 청소는 뒷전으로 밀렸지만, 내 장치가 성공적으로 작동했다는 뜻이다.
창 너머 유난히 파란 하늘을 본다. 다음번에는 하늘이 더 크게 보이는 창을 가진 집에서 살고 싶다 생각하며 쓴다. 어느 기관에서 창밖 풍경이 좋은 곳에서는 일의 효율이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나는 일이 좀 덜 풀리더라도 하늘 보며, 바다 보며 쓰고 싶어 진다. 언제나 가장 효율적인 방법만을 찾는 건 재미없기 때문이다.
써놓은 글이 마음에 안 들고,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 때마다 이렇게 되뇌었다. 그래, 좋아하는 일에는 정답이 없잖아. 그러니까 그냥 쓰자. 뚜벅뚜벅 걸어가듯 한번 써보자.
- <아무튼, 여름>, 김신회
좋아하는 일조차 잘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몇 년이고 쓰려고 하는 걸 보면 나는 써내는 일을 좋아하는 거 아닐까하고 합리적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부끄럽지만 이제야 확신한다. 나도 써내는 일을 좋아한다는 것을. 김신회의 문장을 빌려 다짐해본다. 나도 그의 말처럼 뚜벅뚜벅 걸어가듯 한번 써보자고. 별 볼 일 없는 나라도, 그냥 차곡히 쌓아 가보자고.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작가들은 쓰면서 배운다고 고백했다. 나도 어디한번 잘 배워보자.
다만 그 끝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일을 할때는 끝을 보고 나아가라고 배웠는데, 나는 그게 여지없이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녁이 없으면 활시위를 어디로 당겨야 하는지조차 모르니 목표를 설정하고 일하라는 뜻이었다. 조금 꾀를 내어, 끝을 알지 못하고, 예상하지 않은 채로 나아가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사는 동안 몇 가지쯤은 그런 일을 해도 되지 않을까. 그냥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해 보는 일 말이다. 그저 아무 부담 없이 써볼까 하는 알량한 마음이 든다. 김신회가 말했다. 좋아하는 일에는 정답이 없다고. 뭐든 잘 믿는 나는 이번에도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