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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Feb 06. 2023

인형의 기사 - 3

이혼하면 어때 #17


그 후로 2년 정도 지나서 유경이에게 연락이 왔다.

어느 정도 감정이 정리된 상태였고, 담담히 오랜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유경이 말했다.


“잘 지냈어? 연락 못 해서 미안해.”

“아니야. 하하. 별일 없지? 그런데 어쩐 일이야?”


대범한 척, 아무 일 없는 척 넘겼지만 속으로 '또 돈을 빌리려고 하는 걸까'라는 의심을 접을 수 없었다.


"아. 잘 지내지. 전에 너한테 빌린 돈도 갚고 상의할 일이 있는데.."


연락을 못했던 사정이 있었나 보다. 순간이지만 의도를 의심했던 나를 꾸짖었다.

의심이 걷히니 그녀의 목소리가 다르게 다가왔다. 내가 기억하던 소녀가 성숙한 여인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다음에 들리는 말은 나를 친구에서 남자로 바꾸는 것이 충분했다.


"빌린 돈에 대한 이자도 갚을 겸, 나랑 여행 갈래? 한 3박 4일 정도 같이 갔으면 하는 곳이 있는데."

"여행? 자고 오는 여행?"

"응. 여행."

"나는 좋지. 언제?"

"와아아. 기대된다. 언제냐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급하게 동의했다. 기다리는 자에게 기회는 오는 것인가. 그 사이 몇 차례 짧은 연애를 경험했지만 그녀에 대한 사춘기 시절 애틋함이 다시 느껴졌다.


그후 그녀와의 약속일을 학수고대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


그날이 되었다.

나는 만반의 준비(?)를 했고, 집을 떠나는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서울 어느 카페에서 만난 유경이는 무척 변해 있었다. 수수하고 부끄러움 많은 소녀에서 성숙미가 물씬 풍기는 여인으로 성장했고, 무엇보다 표정에서 나오는 자신감은 학생의 그것이 아니었다.

문득 우리 사이에 이질감이 느껴지며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난 그야말로 MT를 가는 대학생 차림이라면 그녀는 한껏 꾸민 오피스룩이었다. 하지만 곧 그런 사실을 잊고 반가움에 들떴다.


"와아. 너 많이 변했구나. 진짜 많이..."

"헤헤. 너무 바쁘게 지냈어. 그리고 고마워. 초대에 응해줘서."


10분 정도 안부 인사와 반가움 표현하던 그녀는 본래 목적을 밝히기 시작했다.


“내가 사실 너에게 매우 중요한 기회를 주려고 해.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 기회기도 하고..... 그래서 너한테 3일만 나랑 같이 보내자고 한 거야.”


직감적으로 어떤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그때 느낀 실망의 무게가 조금 더 컸으면 하늘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녀가 주선한 여행은 당시에 유행하던 다단계 판매를 교육받는 자리였고, 숙식은 그녀의 집에서 해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표정을 감추고 제안에 응하였고,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경이가 산다는 숙소에 도착해서 그녀의 어머니와 이란성쌍둥이 여동생에게 인사를 했다. 어릴 때 잠깐 본 기억이 있지만, 역시나 다른 모습으로 변해버린 후였다. 그녀는 짐을 풀 수 있는 작은 방을 안내했고, 바닥에는 거대하지만 조금은 허접해 보이는 옥장판이 깔려있었다.


‘이 매트리스가 다단계 상품이구나’


단박에 전후 사정을 알아차린 후 예비군 훈련을 한다는 마음으로 정신을 무장했다.

다음 날 아침,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무척이나 넓고 거대한 빌딩 속이었다. 말끔한 슈트 차림의 남성들과 세련된 옷차림의 여성들. 한눈에 보기에도 귀티가 흐르지만 묘한 가벼움이 존재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몇몇을 제외하면 여유로운 표정들이었지만, 가면을 쓴 듯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수십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몇 무리로 나뉘어 각각의 가이드를 따라 작은 강의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중 한 곳에 배정되어 제일 앞줄 책상에 앉아있었다. 잠시 후 어떤 정장 차림의 남성이 들어와 오늘 일정을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회사의 본부장 A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분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으셔서 이 자리에 계십니다. 이곳을 추천해 준 지인에게 감사 인사를 꼭 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한 시간씩 돌아가면서 저희 회사 임원분들께서 여러분께 강의를 할 테니 잘 들어보시고 기회를 잡기 바랍니다.”


듣기 거북한 소리다. 비록 견문 짧은 나였지만, 불법의 냄새가 풀풀 나는 이곳이 성공의 요람이라는 헛소리를 믿을 정도로 순둥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정말 한 시간씩 돌아가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들어와 경험담이라고 주장하는 소설을 전달했다.


-여러분은 정말 행운아입니다!! 이 시스템은 복리 이자와 같은 마법이에요!

-저는 이 옥장판을 사용하고 디스크가 완치되었습니다.

-제 언니가 암투병 5년 만에 이 옥장판을 사용하고 드라마틱한 효과를 봤습니다.

-저는 단지 3명에게만 추천하였는데 지금은 월 500만 원씩 꼬박꼬박 입금돼요!

-학벌, 배경 없이 여러분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씩 반복적인 세뇌 교육 후 잠깐의 휴식을 반복하며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진행되었다. 하필 나는 제일 앞자리에 앉아 딴짓을 하지 못했으며,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이라 어쩔 수 없이 집중해야 하는 환경이었다.


그렇게 수시간 고문당하고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마련된 자리는 화려한 뷔페였고 손님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궁전에 사는 귀족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유경이를 찾았지만 좀처럼 볼 수 없었다. 꽤 바쁜 모양이었다.

오후 교육 시작. 이번 고문 시간은 오후 2시부터 6시. 4명이나 더 들어온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오후 첫 번째 강사는 놀랍게도.


“안녕하세요. GM인 김유경이라고 합니다. ’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우리가 여태 들은 강의 내용 중 회사 계급에 관한 내용이 있었는데, GM은 ‘Great Manager’로 최고위에 있는 기업 회장의 로열패밀리를 제외하고 일반인이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이었기 때문이다. 이론상으로 GM은 매월 수익이 그 당시 돈으로 천만 원이 보장되는 목표점이기도 했다.


”저는 남들과 달리 대학을 가지 않고, 지인의 소개로 이 회사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


자신감 넘치는 능숙한 말솜씨와 논리. 예전에 알던 유경이는 이곳에 없었다. 나와 같은 처지의 객들은 저 어린 아가씨의 외모와 말에 현혹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모습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 너무 헷갈려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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