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하면 어때 #16
폭풍 같은 수능시험이 끝나고 고3 친구들은 희열, 좌절, 그리고 재도전을 다짐하면서 각자의 자리를 정해 돌아갈 준비를 했고, 새해가 되기 전에 송년회를 하는 계획에 모두 동의하였다.
당시 나와 유독 친한 같은 학교 친구가 있었는데, 나와 그 친구 그리고 유경이까지 셋은 사랑과 우정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숨기며 어울려 다녔다. 그리고 남들에게 절대 말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유경이와 나는 미묘한 썸을 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분명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라는 것이 나중에 증명되었다.
우리 셋은 참석한 송년회 분위기가 무르익은 늦은 밤이 되어, 모인 곳 근처로 산책을 나왔는데 그 ‘버스걸’의 유경이는 다른 한 친구에게 취중 질문을 했다.
“나랑 얘랑 사귀면 어떨 것 같아?”
평상시 성격으로 비춰볼 때 도저히 유경이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돼버린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 친구를 바라봤고, 마찬가지로 적잖이 당황한 내 친구는 정신을 차리고 답변했다.
제발 잘 대답해라. 친구야.
“음.. 내 생각엔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 왜냐면 우리는 신앙으로 만났잖아. 결혼할 거 아니면 우리 우정은 깨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너네 동! 성! 동! 본! 이자나.”
‘이런 개새~에~'
그 말을 듣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을 마음으로 했다.
그 시대는 동성동본의 결혼이 허락되지 않았고, 그것은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N.E.X.T의 앨범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앨범 <The Return of N.EX.T Part 2 : World>의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가 떠오른다.
동성동본, 동성애자를 위한 노래로 동성동본 금혼법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연인들을 응원하며 당시 규제에 대한 비판을 멋지게 했던 신해철식 사회비판곡이다. (참고로 2005년의 민법 개정(2008년 시행)으로 촌수에 관계없이 동성동본 사이의 혼인을 금하던 제도는 폐지되고, 8촌 이내의 혈족 사이에서만 혼인을 제한하게 되었다.)
여하튼 유경이는 그 대답에 수긍하는 듯한 제스처를 하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내 생애 첫 번째 연애가 시작될 뻔한 순간이 허무하게 지나갔고, 우리는 그다음 스토리를 이어가지 못했다.
…새해가 되자 어울린 친구들이 서서히 교회에서 모습을 감췄다. 각자 대학 입학 및 사회생활 등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나 또한 얕은 신앙심으로 인해 교회 출입 횟수가 점차 줄어 발길이 끊기게 되었다.
***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모르는 번호가 찍힌 핸드폰이 전화를 받으라며 바쁘게 울었다. 반사적이고 의무적으로 통화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여보세요?"
"어.. ? 아. 목소리 맞네. XX야 내 목소리 알겠어? 나야 유경이."
상상도 못 했다. 유경이가 전화할 줄은. 왠지 두근거렸지만 티 내지 않고, 아니 약간은 의외라는 목소리를 연출하며 대답했다.
"누구? 유경? 아~~~ 김유경. 그래 잘 지냈어?"
치기 어린 젊음이었는지, 마음을 들킬까 두려웠는지, 최대한 점잖고 어른스럽게 통화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음속은 그 어떤 희열과 벅참이 전화하는 내내 차올랐다. 긴 통화로 서로의 일상과 안부를 묻고 평범한 대화로 이어갔지만, 떨리는 음성 속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되었다.
"저기.. 돈 좀 빌려 줄 수 있어?"
쨍그랑.
그럼 그렇지. 순수한 마음이 깨지는 소리다.
그 사이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 과외 덕분에 여윳돈을 저울질하지 않고 빌려주었다. 빌리려는 이유와 상환 일정을 묻지 않고 멋지게.
그리고 다시 유경이와 연락이 두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