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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Feb 07. 2023

인형의 기사 - 4

이혼하면 어때 #18


약속한 날의 마지막 밤.

유경이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 숙소에는 유경이와 여동생, 여동생의 남자친구, 두 자매의 어머니가 같이 살고 있었다. 여동생과 남자친구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 듯 서로 매우 익숙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자매의 아버지는 세 모녀가 빠져있는 다단계 사업을 반대하다 집을 나가셨다고 한다.


이렇게 5명이 숙소에서 함께 식사를 마치고, 유경이와 밤 산책을 나왔다. 이 순간만큼은 고교 시절에 알던 익숙한 그녀였다. 꽤 어른 인척 하는 그녀지만 그 뒷모습은 매우 왜소해 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어땠어? “


질문과 관계없이 그녀의 긴 속눈썹이 참 이쁘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세뇌 교육의 성과를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대답을 한동안 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다단계 얘기 대신 우리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고,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너랑 같이하고 싶어.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


다시 한번 그녀가 물었다. 꽤 담담하게 얘기했지만 그때의 느낌은 묘했다. 당시 분위기가 주는 느낌은 꼭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너무 달콤해서 같이 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찰나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그 속에서 빠져나오기란 무척이나 어려웠다. 아니, 그러기 싫었다.


“생각해 볼게.”


시선을 마주치지 못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고, 실망이 가득할 그녀의 큰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너무 좋아했던 그 눈을 보고 거절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다.

어색한 분위기로 숙소에 돌아와 잠을 청했지만 온갖 잡생각으로 한숨도 못 잔 채 아침을 맞이했다. 형식상 다음을 기약하며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근처 지하철역까지 나를 배웅한 유경이는 개찰구에서 마지막 손짓을 하며 말했다.


“연락해.”


하지만 그 후로 그녀와 연락을 하지 않았고, 없었던 일처럼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나는 그녀를 잊고 1년 정도 지나, 우연히 그 시절 친구를 만났다. (연애 시작을 방해했던 그 친구 놈.) 그제야 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고, 의외로 그녀의 근황을 알고 있던 그녀석은 이것저것을 알려주었다.


“아 유경이.... 내가 들었는데.. 쫄딱 망했대. 얼마 전 뉴스에 나왔는데, 그 다단계 회장 감옥 갔잖아. 그래서 그 가족은 완전 길거리에 나앉았다던데? 그리고 유경이는 거기서 숙소 생활하던 남자애랑 결혼했다고 하고....”


망했다는 소식보다 결혼했다는 말에 더 충격을 느꼈다. 내가 나온 이후 누군가와 그렇게 나 같은 연을 맺고 결혼까지 했다는 말은 정말이지 믿기 어려웠다.


그 마지막 밤, 내가 그녀의 요구에 응했다면 그녀의 짝이 되었을까?

살아온 나날을 더듬어보면 모든 기억이 선택의 순간이다. 그 선택으로 사랑했던 여자와 결혼을 했고, 또 헤어졌다.


지나간 선택의 후회는 어리석지만,

가끔은 선택을 바꾸는 상상을 하며 여유를 갖고 사는 건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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