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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Feb 06. 2023

인형의 기사 - 1

이혼하면 어때 #15


'이'밍아웃은 십 년 동안 나를 묶어놨던 이성에 대한 갈망을 해제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성을 향한 사적인 생각의 개방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껄덕대며 침 흘리지 않겠지만, 이성을 보는 시선과 생각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사소한 변화였다. 그 변화는 때론 여행을 앞둔 마음처럼 신선하고 활력을 느끼게 했다.

'사회적 성공을 위한 마음가짐이 건조한 결혼생활을 만들었을까'라는 생각은 억측이겠지만, 전혀 연관성이 없진 않겠지.


아무튼 설레는 마음이 구속에 대한 해방감인지, 아니면 새로운 인생에 대한 기대감인지 알 수 없다.

그 감정이 어린 날의 내가 느꼈던 그 두근거림인지.


그 시절 대부분의 남자애들이 그랬듯, 온통 빡빡이들만 있던 남중에서 남고로 진학했다. 여드름이 꽃을 피우며 사춘기를 맞이하고, 내 안에 잠든 흑염룡의 각성을 저울질하던 질풍노도의 시기. 그리고 여전히 여자 사람 구경을 할 수 없는 환경과 나이였다.


그 흔한 미팅도 못 해본 평범한 남고생이었던 난, 세상천지에서 여자의 존재를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교회에 몸을 의탁하였다.


불순한 의도를 숨긴 채 도시 구석 허름한 개척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핑크빛 세상을 꿈꾸며 교회에 입성하긴 했지만 그저 그런 중고등부 교회오빠로 순식간에 변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 재학 중인 학교에는 ‘버스걸’ 소문이 있었다. 버스로 통학하며 자연스레 '그' 소문도 알게 되었다.


아침 등교 시간, 특정 버스를 타면, 항상 같은 자리에 여학생이 앉아있고 무척이나 이뻐서 뭇 남학생들의 마음을 흔든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여학생이 하차하는 곳까지 따라갔다가 다시 반대편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멍청이들도 존재한다는 증언이 이어졌는데, 항상 소문은 부풀려지기 마련이라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다.


대학 수능 준비로 바쁜 나날이었지만, '대한민국 고삼'의 권력을 십분 활용하여 교회 행사는 꼭 참가했다. 특히 연초 새 친구들 맞이 큰 행사가 있었는데, ‘뉴페이스 자매’ 영접은 놓칠 수 없는 교회 형제들의 즐거움이었다.


친한 또래 애들과 초코파이가 수북히 쌓인 동산 앞에서 수다를 떨며 가벼운 기대감을 갖고 메인 행사를 기다렸다. 분주한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새로운 친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주섬주섬 단상 앞에 일렬로 늘어서는 아이들은 참으로 순수한 모습이었다. 항상 교복을 입어야 했던 우리네 모습에서 벗어나 평상복으로 한껏 멋 부린 어색함은 그 나이대만 줄 수 있는 풋풋함이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여학생이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가지런한 검은 머리카락, 작고 하얀 얼굴 사이로 보이는 수줍은 미소는 주변을 환하게 비추는 것 같았다. 마치 후미진 시골 학교에 얼굴 하얀 서울 여자애가 온 듯한 느낌이었다.


당시를 회상하면, 어릴 적 너무나 좋아했던 밴드 -N.E.X.T 1집의 인형의 기사- 도입 내레이션을 떠올리게 한다.


『 햇살 속에서 눈부시게 웃던 그녀의 어린 모습을 전 아직 기억합니다.

그녀는 나의 작은 공주님이었지요.

지금도 전 그녀가 무척 보고 싶어요.

우리 어릴 적에 너는 내게 말했지.

... 』


그렇게 넋 놓고 있다가 새로운 형제·자매의 소개가 끝이 났다. 잠시 후 학년별로 시간을 갖게 되었고, 고3 끼리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 여학생을 데려온 친구가 간단히 소개했다.


"얘는 나랑 3년 내내 같은 반, 유경이야." 머뭇거리는 여자애를 보고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자기 소개해."


여자애는 낯선 환경이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똑바로 들지 못하고 조용히 말했다.


"안녕. 얘들아. S고에 다니는 김.유.경. 이야. 만나서 반가워."


쑥스러워하는 여자애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자기 친구를 쳐다봤다. 소개한 친구는 눈이 가늘어졌다.


“... 음 그리고 유경이가 101번 버스, ‘버스걸’이라는데? 크크크.”

"야아. 아니야. 너 그런 법이 어딨어."


친구의 짓궂은 소개에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그러지 말라며 연신 손짓했고, 모두 활짝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그렇게 ‘버스걸’ 소문의 주인공을 영접하고, 유경이와 나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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