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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Feb 15. 2023

연인을 믿지 못하게 된 이유 - 1

이혼하면 어때 #21

시간이 흐르고 다양한 인간사를 겪으면서, 마음속에 내린 결정은 번복하지 않았고 조금은 고집스러운 면이 생겼다. 그 시기는 어느 정도 나에 대한 확신이 생긴 이후였다.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나라는 인간은 정에 약하고, 우유부단하며 모질지 못했다. 사람을 한번 좋아하거나 믿으면 뼈와 골수까지 바치곤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변한 것은 20대의 만난 그녀 때문이다.


만약 그녀로 인해 바뀐 내 모습이 아닌, 그 전의 나였다면 이혼의 도장을 찍지 않고 붙잡았을까?


20대의 마지막을 보내고 가슴 아픈 이별을 통보했다. 그것도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우리는 대학에서 만나 무려 8년을 사귀었지만, 그녀는 세 번의 바람을 피웠고 나는 이별을 통보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 집 앞 벤치에서 이 주일 째 퇴근 후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


***


어릴 때부터 연애에 대한 나만의 낭만이 있었다. 한 여자와 평생을 사랑하고 같이 손잡고 노년을 보내며 한날 한시에 눈감는 아주 흔하디 흔한.

그런 꿈을 꾸며 성인이 되고 어느덧 대학생활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새 학기가 되었을 때 대학생 남자 선배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쁜 새내기 여자였다. 4학년이 된 나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소문을 동냥하곤 했는데, 올해에는 정말 역대급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런저런 소문 중 가장 솔깃한 것은 속칭 ‘공대 전지현’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새내기가 있다는 말이었다.

전지현이라니.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했지만 한 번 보고 싶긴 했다.


오로지 잘 보이기 위해 기타를 연습해 온 나의 손가락. 공강 시간만 되면 학회실에 앉아 새내기들에게 추파, 아니 감성을 던졌다. 물론 한 곡만 완주할 수 있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았고.

그러던 어느 날,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들어오며 인사를 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XX학번 새내기 인사드립니다아.”


배꼽인사를 하며 들어오는 귀염둥이들은 어색한 화장과 옷차림이 고등학생 티를 벗어나지 못했다.


"선배님들! 새내기는 점심값을 내지 않는 거라고 학회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밥을 사달라고 조잘대는 모습은 너무 귀여울 뿐이었다. 무리에서 제일 뒤에 있는 여자애는 큰 키로 단연 눈에 띄었다. 당시 유행했던 DJ.DOC의 히트곡 중 이런 가사가 있있지.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


늘씬한 몸매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무척이나 어울렸다. 흰 티에 청바지 조합은 몸매가 자신 있는 여자의 국룰인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저 애가 소문의 전지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군들이여. 배고픈 자는 따라오라."

"와아아아. 선배님 최고!"


나는 어설픈 기타 쇼는 집어치우고 그 무리의 새내기들을 모두 데리고 학생식당으로 갔다. 밥을 먹으며 내 소개를 하고 새내기들의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물론 은근히 내 핸드폰 번호도 교환하며.


몇 달후, 긴 생머리 그녀와 친해질 계기가 마련되었다. 연결점은 음악이었다.

어릴 때부터 X-JAPAN에 목숨을 걸었던 그녀. 고등학교 시절 멤버 중 히데가 자살한 날에 학교를 빠지고 추모하러 갔다고 한다. 그녀의 모든 아이디가 'hide'로 통일되던 이유가 설명이 되었고, 당시 대학 밴드부 보컬 경력이 있던 난, 노래방에서 X-JAPAN 노래로 그녀의 관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내가 호감이었는지 록페스티벌 공연을 같이 가자고 했다. 그 공연 자리에서 그녀는 대담하게 나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그날부터 사귀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연애는 시작됐다.


어릴 적 낭만이 생각나는 연애를 꽤 오래 했고, 나의 마음은 점점 깊어져갔다. 하지만 그녀의 낭만은 나와 달랐는지 만남의 시계가 3년이 채 가기 전에 내 인생의 가장 강력한 드라마가 시작됐다.


***


그녀의 첫 번째 바람은 나와 그녀의 학과 후배였다.


시간이 지나 내 신분은 학생이 아닌 직장인이 되었고, 적은 월급이지만 둘이 즐기기엔 충분한 사치를 누리며 데이트를 했다. 병역을 대신한 특례 연구원인 신분과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 특성상 잦은 야근은 필수여서 주중에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으레 토요일 오후 시간에 만나는 것은 오랜 시간 굳어진 데이트 룰이었다. 당시 토요일 출근은 당연한 일이라, 학생인 그녀는 항상 PC방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퇴근 후 약속한 PC방에 도착하니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가 보였다. 반가움에 인사를 하려다, 잠시 놀라게 하려고 등 뒤로 몰래 갔다.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어떤 남자의 싸이월드에 빠져있던 그녀의 눈. 그 범상찮은 눈을 보니 그 남자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그 남자는 누구야?”

“으앗! 오빠 왔어! 응. 우리 과 후배야.”


한눈에 보기에도 잘생긴 얼굴과 세련된 스타일. 알고 보니 꽤 학교에서 유명한 후배였다. 그때까지도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나갔고, 매주 토요일 저녁 시간은 여느 때와 같이 보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나 항상 만나던 시간 즈음에 연락이 두절된 일이 발생했다. 거의 24시간을.

신내림을 받은 것처럼 몸이 부르르 떨리며 불길한 느낌이 내 온몸을 감쌌다. 그리고 몇 주 전에 보았던 그 모니터 속 남자 후배의 연락처를 급하게 수소문했다. 이 정도로 확신에 찬, 강렬한 직감은 난생 처음이었다.

다음 날 아침,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전화를 했다.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여보세요..


전화 수신 대기음이 지나 나지막한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막 일어난듯한 저음 목소리가 거슬렸다. 그리고 직진하기로 마음먹었다.


“나 XX학번 XX라고 하는데. 나 알지?”


이렇게 건방지게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후배보다 내가 한참 선배기도 했지만, 후배들에게 나는 꽤 ‘인싸’였다. 가족 중에 TV에 보이는 유명인이 있기도 했고, 과 후배들의 행사에 초대되어 '지갑 전사'가 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 네. 선배님... 알고 있습니...”


마지막 ‘다’가 잘 들리지 않는 무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무언가 체념한 듯한 목소리다. 이 순간 내 직감이 맞았음을 느끼고 전화기를 든 손에 힘이 빠졌다.


“거기 MJ 같이 있지? 좀 바꿔줘.”


반은 확신, 반은 넘겨짚으며 질문을 했고 그 남자 후배는 둘러대지 못했다.


“지금.... 누나가 술이 안 깨서 정신이 없습니다. 정신이 들면 전화하라고 하겠습니다...”


술은 어제 먹었을 것이고, 지금은 자고 일어난 아침인데, 네 말이 거짓말인 것은 말하는 너도 알고 나도 알겠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한 그놈은 나의 처분을 기다렸다. 분노가 온몸을 지배해서 날뛸 줄 알았던 생각과는 달리 감정이 차분해지며 준비한 듯 말을 건넸다.


“흠. 알았어. 술 깨면 잘 챙겨서 학교 앞으로 같이 와. 택시비는 내가 줄 테니.”

“저도요?... 네. 알겠습니다....”


차분하게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했다. 화를 내거나 욕지거리를 해댔으면 다음 상황이 엉망이 될 뻔했다.

그것도 잠시. 곧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머릿속은 공황이 찾아왔다.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왔는지 지난 3년을 되짚으며 기억을 복기해 봤지만 정말 알 수 없었다.

씨발.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으며 옷을 갈아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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