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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Feb 16. 2023

연인을 믿지 못하게 된 이유 - 3

이혼하면 어때 #23

그 후, 3년이 흘렀다.


동네 친한 친구(첫 사랑을 방해했던 그놈)가 한 명 있었는데, 그 녀석의 부모님이 인천 부평에서 노래방을 운영했다.


2000년대 중반, 노래방은 한국의 전통적인 흥을 기반으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즐기는 문화로 정착한 상태였다. 주말이면 몰려드는 손님들 덕에 가게 일손이 부족하여 친구의 사촌이 와서 일을 도왔다.


"형. 왔어. 오늘 왜 이렇게 옷을 거지같이 입고 왔어. 크하하하."


주말에 시간을 내서 노래방에 방문하니 카운터 앞 친구의 동생놈이 하는 말이다. 어릴 적부터 친한 사이라 더욱 그런 것도 있지만.


20대의 남자애들은 몇 살 터울이 나지 않는 경우, 보통 형 정도로 호칭을 부르며 반존대로 대화한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그 친구의 사촌이 말한다.


"형님. 오셨어요? 겉옷 주시면 제가 옷걸이에 걸어 놓을게요. 저 주세요."

크으으. 이 올바른 사회성. 이렇게 다르니 너를 안 좋아할 수가 있니.


그 노래방을 아지트로 삼는 20대 중반의 내 친구들은 무척이나 싹싹하고 밝은 성격인 '성준'이를 좋아하고 아꼈다. 그 친구는 극존대의 예의바름과 남다른 매너로 형들의 사랑을 받았다.


살던 동네는 무척 좁아서,

아는 친구의 아는 형님의 아는 동생이요오오오.

하는 학연과 지연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새로 유입된 타지역 이주자들은 지역 텃세로 적응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동네에는 지역 상권 유지 목적이라는 미명 아래 삥 뜯는 상인연합회가 구성되었는데, 그 또한 내 또래 건달 친구들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잘 정착한 '성준'이는 노래방에서 일을 도운 지 1년이 지나, 근처에 본인 술집을 창업했고 지역의 일원이 되었다.


그 무렵 나와 내 여자친구는 사귄 지 오래 돼 친구,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우리 커플과 친하게 지냈다.

나는 연애할 때 주변 사람에게 연인을 소개하고 관계를 굳건히 만드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그 버릇이 눈 먼 믿음이 되어 결국 모두를 망치는 결과로 이어질 줄이야.


***


여자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내 부모님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취직했다. 전공에 맞지 않는 직무였지만, 우리 부모님은 그녀를 며느리로 생각하신 지 오래였고, 그녀도 그 뜻에 동의해 졸업 후 줄곧 병원에서 일을 했다.

당시 나는 서울에 있는 회사에 취직해 동네 친구들과 어울림이 적었고, 어느새 나의 커뮤니티로 녹아든 그녀는, 나 없이 내 주변 모든 사람과 허물없이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나와 그녀는 동네 카페에 한가로이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메신저에 열중인 그녀에게 물었다.


“누군데 그렇게 열심이야.”


잠시 머뭇거린 그녀가 대답했다.


“응. 성준 오빠.”


다른 부연 설명 없이 자연스럽게 나온 이름은 그 앞서 말한 친구의 사촌 동생이었다. 나의 부재 중에도 내 연인을 챙겨주는 수고로움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우리의 청춘은 즐겁고 바쁘게 지나가고 행복이 계속 될 것 같았는데.


띠링.


근무 중에 울린 성준이의 문자 알림이었다.


형님. 퇴근 후 시간 되시면 저희 가게에 잠시 들러서 차 한잔하시죠.


나이에 비해 항상 정중하고 예의를 잊지 않는 동생이지만 오늘따라 의미심장한 ‘깍듯함’이 느껴졌다.

해가 지고 부평거리에 네온사인이 뒤덮을 때 쯤 가게에 도착했다. 평일 이른 저녁이라 그런지 가게 안은 한산해 보였다. 성준이는 서빙 때문에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으며 가게 안쪽 테이블로 나를 이끌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뜬금없는 얘기를 했다.


“형님.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오해 말고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의 첫마디에서 기분 나쁜 감각이 등 뒤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저기... 가 어제 많이 취해서 같이 있었는데..”


정신이 아득해졌다. 뒷얘기는 잘 들리지 않았고 몸이 땅으로 꺼지는 착각이 들었다.


"......... 물론 별일이 있거나 한 건 아니고. 다만 오해하실 수 있는 상황이라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어찌됐건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을 하지 말아야지.

이런 사이가 얼마나 오래되었고 또 얼마나 많은 추파와 해프닝이 있었을지. 추측과 망상의 시간을 지나,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괴로워하는 동생이 시야에 들어왔다.


문득 그 녀석의 얼굴을 보니 무척이나 미안하고 황망한 표정이었다. 내가 아는 이 놈의 성격과 매너로 보아 둘 사이에서 불결한 일이 있는 건 아닐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게 더 편했을지도.

또 이런 추태라니.

나는 말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뜨며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어디야?”

“응. 집.”


어제 피곤해서 일찍 잔다고 했던 그녀의 거짓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잠시 숨을 고른 후 말했다.


“성준이한테 얘기 들었어. 네 거짓말에 아주 신물이 난다. 이제 그만하자.”


답변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끊자마자 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그나마 3년 전보다는 충격이 덜한 듯했다.


***


짧은 통화 후 익숙한 거리를 정신없이 걸었다. 


억울함.


지금 느끼는 감정은 연인에 대한 괴로움보다 억울함이 더 컸다. 한 눈 한 번 팔지 않았던 내 순정과 미래를 꿈꾸며 소비했던 수 많은 시간이 허무했다.


망연자실 담배를 물고 길바닥에 쪼그려 앉아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헐레벌떡 달려와 땀 흘리는 그녀가 눈앞에 있었다.


무심코 주변을 살펴보니 차가 다니는 길은 아니었다. 전처럼 달리는 차에 뛰어들겠다는 말은 안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얼마 후 나는 또 그 눈물과 하소연, 약 먹고 죽겠다는 협박(?)에 굴복했다. 상대적으로 덜한 충격과 익숙함이 그만하면 됐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녀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오빠를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결혼은 오빠랑 하고 싶어. 하지만 결혼해서도 남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야."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떻게 결혼을 하고 다른 남자를 동시에 만난 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어느 수준까지의 남자 친구를 말하는 건지 혼란이 왔지만 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진면목을 이제야 알았다고 생각했고, 그날을 계기로 그녀에 대한 입장을 수정했다.

사실 그녀는 모르는 얘기였지만 동반 해외 유학을 집에서 제안했고 고민 중이었다. 당시 우리의 결혼까지 고려한 집안의 결정이었는데, 창업을 꿈꾸던 나에게 유학은 시간 낭비 같아 미루고 있었던 것이고 그 사실을 그녀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난데.... 전에 말했던 유학은 없던 일로 하는 것이 좋겠어.”


나는 이번 일로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접고 헤어질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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