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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Feb 16. 2023

연인을 믿지 못하게 된 이유 - 4

이혼하면 어때 #24

그녀의 마지막 바람은 근무하는 병원의 남직원이었다.

그곳은 -이미 언급했지만- 나의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병원이었고, 그 남자는 얼굴도 본 적 없는 구급차의 운전수였다.


8년의 마침표 치곤 우습고 별거 아닌 우연이었다. 그냥 나의 '촉'으로 타이밍을 찍었다고 할까.

연인끼리는 분위기가 바뀌면 금방 알아챈다. 아마도 나는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어서 더욱 예민하고 민감했던 것 같다.


우리 데이트 패턴은 일주일에 하루 만나는 것으로 어느 정도 굳어져 있었고, 그날은 거의 토요일이었다.


"오빠. 왔어?"

"응. 오늘은 뭐 먹을까?"


느긋한 토요일 오후였다. 다음 날이 휴일이라는 조건은 세상 행복하고 편안해지는 시간이다. 그녀가 말했다.


"아무거나."


식욕이 없었는지 기운 빠지는 얼굴과 대답이었다. 잠시 후 말을 덧붙였다.


"오빠. 나 오늘 컨디션이 별로라 일찍 집에 가서 쉴게. 내일까지 집에서 잠 좀 자야겠어."


일주일 만에 만난 그녀는 밥을 먹기도 전에 헤어질 시간을 정했다. 일요일인 내일도 집에 있을 테니 그리 알라는 건데...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는 그녀의 눈과 미세하게 떨리는 말투. 그녀의 연기는 완벽하지 못했다. 그 어색함과 불안함의 냄새는 나에게 경각심을 주었다.


"집에 가서 연락할게."


식사를 마친 그녀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그녀는 씻고 잔다는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마무리 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의 집에 전화를 걸자 그녀의 언니가 받았다. 당시에는 지금과 다르게 집 전화가 필수였고 그녀의 식구들과 친한 사이라 불편함은 없었다.


"여보세요.누구세요?"


그녀의 언니 역시 나와 친한 사이였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혹시 MJ 많이 아파?"

"아. 오빠. 안녕하세요. 아침에 약속 있다고 나간 것 같은데!? 아닌가. 지금 자고 있나..."


넌지시 얼마나 아프냐고 물었지만 집에 없다는 답변과 함께 횡설수설 됐다. 모든 가정을 뒤로 하고 그녀는 지금 집에 없다는 것.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이제 정말로, 리얼리, 혼또니 인연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확인할 것 없이 문자로 이별을 통보했다.


-넌 정말 최악이구나. 이제 더 이상 연락하지 마.


몇 시간 뒤, 전화로 화를 내던 그녀. 어떻게 사람 뒤를 캐고 다니냐는 식의 분노를 내게 쏟아냈다. 무대응으로 일관하니 오해한 거라는 스토리로 이어졌다.


나는 그 확인마저 귀찮을 뿐이었다. 사실을 파악하고 해명하는 말을 듣고 다시 이해하는 과정이 싫고 덧없다고 느껴졌다.


그녀와 8년 간 만나왔던 시간을 회상하며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눈물은 말라버렸는지 슬프지도 않았다. 다만 그녀의 근무지가 내 부모님의 병원이라 이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


그렇게 그녀는 변명을 그만두고 우리 집 앞에서 2 주일째 나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

가족은 나를 비난하며 욕했다. 그리고 나는 그 비난에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2 주일 후 장문의 메일을 내게 보내왔다. 

요약하면 너무 사랑했고 고마웠고 행복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부모님께 싫증 나서 헤어졌다고 둘러댔고, 근처의 모든 지인에게도 그녀의 바람은 비밀로 함구했다. 그녀의 생활권은 나와 겹쳐있었으므로 일반적인 이별이 아닌 다른 이유가 회자되는 것은 나도 싫었다.


가족과 주변 지인들에게 몇 달을 욕먹으며 꿋꿋이 비밀을 지켰고, 지금도 어머니는 그녀 얘기를 하신다. 병원이 부도가나 자금 운용이 어려울 때도 본인을 보살폈다며.


헤어진 지 1년 후 즈음, 친한 만두가게의 형과 오랜만에 술자리를 같이 했는데 그 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내가 그때 말은 안 했는데, 새벽에 와이프랑 을왕리로 드라이브를 가는 중에 MJ를 봤어. 근데 옆에 네가 아니더라? 그 새벽에는 차가 두 대만 나란히 달리고 있어서 내가 운전석에서 금방 알아봤는데, 계속 확인해도 걔더라고. 혹시 네가 알아도 좋을 것이 없어서 말 안 했는데, 헤어졌으니 이제야 말하는 거야. ..그리고..."


그날은 그녀와 연락이 두절된 날이었다. 바보같이 다른 사람에게 걸리기나 하고.


20대를 그녀에게 바쳤다. 물론 그녀도 나에게.

우리는 20대의 불같은 연애를 했고 그만큼 성숙해졌다. 나는 그녀로 인해 뒤돌아보지 않는 냉정한 가슴을 배웠다. 그 이후 나는 연인이 돼 큰 싸움과 갈등이 생기면 다시 봉합하지 않았고, 나만 봐주는 여자를 내가 원하는 가장 큰 가치로 추구했다.


그 후에도 돌싱이라는 딱지를 얻었지만,

나에게 등을 돌리면 이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한다.


돌아가면 같은 이유로 헤어지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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