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한 번 이직했다

치과위생사의 이직

by 글짓는써니


나는 한 번 이직했다.


그 이직은 몹시 성공적이었다.

나에게 맞춰 진료시간을 바꿔주었고

인정을 페이로 표현해 주었고

나를 보석 같다 말해주던 환자들이 있었고

일은 재미있었고

마음은 편안했다.






이직 후 이전 직장의 오래된 선배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


친근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을 갖고 생각지 못하게 불쑥 듣게 된 말



옮기고 나서 뭘 제일 후회해?



가벼이 답할 수만은 없었던 선배의 질문이었다.





후회할 것이 분명하다는 강한 확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지금 생각해보면 걱정을 가장한 무례할지도 모를 물음. 그 직장이 진리이자 우주라고 믿는 선배인 걸 알고 그 '대단한'우주에서 제 발로 기어이 벗어나고 말았던 나는 '이상한' 후배였다는 걸 알기에 대답에 더 많은 고민이 되었다.



상대가 상처 받지 않도록 배려할 수 있는 대답을 빠르게 생각해내야 했다. 선배의 질문에 따르면 나는 후회를 하고 있어야 한다. 정답지는 이미 나와 있었다. (그렇다. 난 예나 지금이나 고양이를 걱정하는 생쥐다)




여기서는... 정말 일만 열심히 해요





짧은 시간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려 쥐어짜 낸 대답은 내가 생각하는 장점이자 그가 생각할 단점이었다. 분명히 거짓은 아니었으니 마음이 불편할 것도 없었다.


나의 '후회'에 대한 답변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한결 편안해진 톤으로 기억도 나지 않는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더랬다.






이상하게도 이 짧디 짧은 만남의 기억이 잘 안 잊힌다.

질문과 대답 사이에 떴던 그 짧지만 길었던 정적의 시간과 쥐어짠 대답에 대한 선배의 안심하던 표정이 말이다.

무슨 의미의 물음이었을까...








나의 첫 직장은 흔히 말하는 큰 치과였다.

원장은 많고 직원들은 더 많고 환자들은 더더 많았던...

그곳에서 후회 없을 만큼 많이 배웠고 많이 웃었고 많이 울었다. (술도 원 없이 마셨다)



운 좋게도 첫 원장님으로 정말 좋은 분을 만나 진료의 정석과 마음가짐 그 이상의 것들을 보고 배웠다.

좋은 선배를 만나 좋은 태도를 배웠고 나쁜 선배를 만나 '저리는 살지 말아야지...'를 배웠다.

그저 배우고 배우고 계속 배워나가다 보니 어느새 후배들이 종종거리며 나를 따라 배우는 때가 됐다.


그 배움들로 오랜 시간 어찌 보면 편안하게 밥 벌어먹고 살았다.


꽤나 좋은 '양성소'같았던 그 직장에서의 좋은 기억들은 막바지의 나쁜 기억들로 상쇄되어 사라졌다.

어느새 좋은 것보단 나쁜 것들이 수시로 나를 찔러댔고, 나가려는 자와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자의 미묘한 기싸움은 몹시 피로했다. 좋은 시선으로 보지 못하니 모든 것이 나빴고 싫었고 미울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다.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버티고 버티며 마지막만 기다리다 맞게 된 이직이었다.




이직 과정은 쉽지 않았다. 아니, 이직이 아닌 퇴사 과정이 쉽지 않았다.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고 발전과 성장을 축복해줄 수 있는 관계는 티브이 속에만 있는 픽션이었다. 지금껏 해왔던 노력도 성과도 '급작스레(생쥐가 1년이라는 시간을 드렸음에도) 나가려는 배신자'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껏 해왔던 성과가 더 발목을 잡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유아 무야 별다른 성과 없이 희미하게 존재했더라면 조금 더 여운 없이 나올 수도 있었을까.


최고의 아군이었던 나는 한순간 최악의 적군이 되어 버렸다. 무심한 듯 무표정으로 일관해야 했지만 오만가지 생각과 고민을 끌어안는 습관이 있던 나로서는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떤 직장인이든 매 순간 퇴사를, 이직을 고민한다.

나가느냐 지키느냐의 기로에서 하는 결정에 대해 나와 다른 결정을 한 '그'보다 '나'의 선택이 옳길 바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기심이다.


상대의 감정이 느껴진 순간 씁쓸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마음 한켠이 서늘했지만 그저 그뿐 상대가 더 미워질 일도 아니었다.








나는 운이 참 좋았다.


후회하지 않는 이직 덕에 일로도 사람으로도 한 뼘 더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