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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퍼도 꾸준히 May 09. 2020

미니멀라이프의 길

구두쇠와 칸트, 보따리상 그 어디쯤.

제로웨이스트, 즉 쓰레기 없는 생활을 실천하려니

나의 본성에 어긋나는 준비가 필요했다.


나는 즉흥적인 사람인데

제로웨이스트를 위해서는

약간의 계획성이 필요했다.


길을 걷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하려면

일회용 컵 대신 커피를 담아 줄 텀블러가 필요했고

퇴근길 돼지고기 한 근을 사려면

고기를 스티로폼과 랩으로 포장하지 않도록

통을 가져가야 했다.


되도록 쓰레기 없는 삶을 살자고 다짐했으므로

텀블러와 고기 통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면

돈이 있어도 커피와 고기를 살 수가 없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구두쇠처럼 돈을 아끼게 됐다.



생각 없이 나가서 빈손으로 돌아오길 수차례,

커다란 가방을 꺼냈다.

집을 나서기 전 가방에 고기 통과 텀블러를 담았다.

본성을 거슬러 칸트 같이 계획적인 행동을 했다.

어떤 커피를 사고, 어떤 저녁 메뉴를 만들어 낼지

미리 생각을 하고 집을 나섰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즉흥적인 사람이었다.

집에서는 꼭 사 먹고 싶었던 커피도,

저녁 메뉴로 고른 제육볶음도

막상 살 때가 되면 사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카페인을 받아들이기엔 심장이 너무 벌렁였고,

제육볶음보다는 김치부침개가 땡겼다.

텀블러와 고기 통을

고스란히 들고 집에 왔다.


구두쇠처럼 돈을 아끼는 것도

칸트처럼 계획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나는 보따리상이 되기로 했다.

가방에 텀블러와 장바구니, 고기 통을 항상 들고 다니면

내 본성에 맞게 즉흥적인 구매를 할 수 있었다.

다만 내가 커다란 가방에 잡단한 것들을

한 보따리를 들고 다녀야만 했다.

커다란 가방이 거추장스러웠다.


여전히 나는 구두쇠와 칸트, 보따리상 사이를 헤매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즉흥적인 사람이기에

셋 중 하나를 즉흥적으로 고르는 것이 마음에 든다.

반드시 정해진 틀대로 할 필요는 없으니까.


오늘도 나는 나에게 마법의 주문을 건다.

완벽한 환경보호자 한 명보다는

어설픈 환경옹호자 백 명이 되자고.


무거운 가방이 들기 싫은 날은 구두쇠가 되고,

오늘 저녁 먹고싶은 게 생겼다면 칸트가 되고,

그것도 아니라면 보따리상이 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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