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매거진
어설퍼도 미니멀 제로웨이스트
실행
신고
라이킷
16
댓글
6
공유
닫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브런치스토리 시작하기
브런치스토리 홈
브런치스토리 나우
브런치스토리 책방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어설퍼도 꾸준히
May 10. 2020
치킨 두 마리와 투덜이 남편
투덜거려도 내 말은 잘 들어요.
"나 처*집 양념통닭 먹고 싶어."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내가 한창 제로웨이스트, 즉 쓰레기 없는 삶에 대한
의욕이 넘쳐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띄웠다.
"그거 내가 만들어줄게."
남편이 투덜댄다.
자기는 간단하면서도 맛있는 치킨이,
꼭 처*집 양념통닭이 먹고 싶은 거라고.
"자기야, 치킨 시키면 쓰레기 얼마나 나오는 줄 알아? 치킨박스, 치킨무 통, 콜라, 머스터드, 젓가락.
내가 맛있게 만들어줄게."
나는 아랑곳 않고 검색을 시작한다.
양념통닭 만들기.
검색을 하다 슬그머니 남편을 봤다.
적잖이 못 미더운 모양이다.
그래도 내가 요즘 얼마나 제로웨이스트에 꽂혀있는지 잘 아는 남편은 표정으로나마 소심한 반항의 빛을 낼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다.
가만있자.
일단 닭 한 마리.
정육점에 가서 썰어달라고 해서 살 수 있나?
얼마 전에 앞다릿살 통에 담아서 사기를 실패한 터라
살짝 겁이 났다.
닭도 정육점에서 파는 것이 맞나?
그리고 닭을 튀길 기름 왕창.
아싸. 정육점에 가지 않을 좋은 핑계(?)가 보인다.
내가 치킨을 만들 때 쓰일 식용유가 문제다.
난 일회용이지만 치킨집은 여러 번 쓸 테니
치킨집에서 시키는 게 더 친환경적이다!
나는 주방에서 커다란 유리볼(물론 뚜껑과 손잡이가 달렸다.)을 꺼내 남편에게 내밀었다.
"자기야. 치킨 여기에 사 올래?"
남편의 얼굴이 오묘하다.
만들어주는 것보다 시킨 게 먹고 싶지만
전화 한 통이면 될 것을
유난스럽게 통까지 가져가서 사 오기는 싫은 모양.
"아니면 정육점에서 거기에 닭 사다 줘요."
남편은 이제 결심을 굳혔다.
"치킨 사 올게."
치킨을 사 온 남편은 할 말이 많았다.
"내가 이 통 내미니까 아저씨가 얼마나 황당해했는 줄 알아?"
남편이 투덜댄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다.
"치킨 눅눅해진다고 자꾸 안 된다는 걸
내가 뚜껑 열고 간다고 우겨서 받았어.
콜라랑 치킨무 이런 것도 다 필요 없다고 했어.
나 잘했지?"
실제로 남편은 뚜껑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신나게 오는 대신
뚜껑을 살짝 걸친 채로 조심조심 집으로 왔다.
나머지 플라스틱에 담긴 기타 먹거리(지만 실제로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는 놔두고.
우리는 통을 그대로 식탁에
올리고
김치를 꺼냈다.
그리고 캔맥주를 땄다.
치킨은 아직 따뜻하고 바삭했고
맥주는 시원했다.
쓰레기는
맥주 캔과 닭의 잔해들 뿐.
캔이 조금 걸리지만 이만하면 성공적이다.
투덜이지만
너무나 사랑스러운 남편과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든 밤이다.
치킨 사러 떠나는 사랑스러운 뒷모습.
물론 당사자는 투덜대고 있다.
(사진은 남편의 허락 하에 올립니다.^^)
keyword
치킨
남편
미니멀라이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