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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퍼도 꾸준히 May 09. 2020

집 비우기, 짐 비우기.

미니멀라이프의 시작

손바닥만 한 신혼집.

아직은 나와 남편 둘 뿐.

둘의 짐은 이삿짐센터도 필요 없이

남편은 셀프로

나는 엄마 아빠 차 한 번으로 짐을 다 옮길 수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새 가구를 들이고

집을 꾸몄다.

우리는 티브이는 보지 말자며

거실 한쪽에는 우아하게 책장을 두고

가운데에는 때로는 맛집, 때로는 카페가 될

식탁을 두었다.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집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나는 과정은

정말로 재미가 쏠쏠했다.


3년이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고

나랑 남편이 서로 방귀쯤은 아무렇지 않아 질 무렵

우리의 사랑만큼(?) 더 넉넉해진 것이 있었으니

살과 흰머리, 그리고 짐덩이다.


코딱지만 한 신혼집에

우리 둘은 참으로 열심히 무언갈 실어 날랐다.


운동을 좋아하는 남편은

스쿼트기계, 복근 운동기계, 간이 철봉, 요가매트 등

평소 소원하던 집안 헬스장을 꾸밀 재료들을 열심히 날랐고

다리가 자주 아픈 나는

발마사지기, 족욕기, 공기압 마사지기, 마사지 건 등

내 피로를 날려줄 아이들을 열심히 날랐다.


그뿐이랴.

보는 눈이 많은 직업 탓이라며

둘이 동네 쇼핑몰로 마실 나가면

나는 항상 한 두 개 옷을 들고 왔고

할인받는 게 그리도 뿌듯하다며 

핫딜 점검이 아침 일과인 남편은

거의 매일 택배박스를 집으로 들였다.


그 결과 냉장고와 옷가지로 시작했던

작은방은 창고가 됐고

작은방에서 넘쳐흐른 물건들이

점차 집안 곳곳으로 흘러나왔다.


집안에 누워 뒹굴 곳은 침대뿐이라

휴일이면

우리는 오붓하게 침대에 누워서

열심히 아이쇼핑을 하고

집에 있는 게 답답하면

쇼핑몰로 산책을 나갔다.


슬슬 아이를 가져볼까 싶어 지는 날들이 많아졌다.

맘 카페를 열심히 들락거리며 정보를 모았다.

아이가 하나 태어난다는 것은

엄청난 짐이 함께 늘어난다는 것을 뜻했다.

당장 아이가 있을 곳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코로나로 아이 갖기가 망설여지고

집안에 갇혀있자니

넘치는 짐덩이에 숨이 막혔다.

그 쯤 미니멀 라이프와 제로웨이스트에도 눈을 떴다.


미루고 미루던 짐 정리를 할 때가 온 것이다.


우선 옷부터 시작했다.

지난 3년간 둘이 합해 초등학생 한 명분의 살이 쪘으니

작은 옷부터 치우자는 심산이었다.


살 빠지면 입으려고 곱게곱게 간직해온

옷들을 하나씩 꺼내면서

제법 마음이 쓰렸다.

몇 번 입지도 못하고 내놓거나

한 번도 입지 못한 옷도 제법 많았다.

분명  참 예 옷이었지만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사이즈가 안 맞다거나(귀찮아서 교환도 안 했구나...)

다음 계절에 입어야지 했다가 까맣게 잊었다.

가끔 사진과 참 다른 옷이 배송 되어도

착한 소비자는 고대로 택을 떼고

옷장에 넣어만 두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옷을 꺼내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후련했다.

십 년 묵은 때를 벗긴 기분이었다.


옷을 골라내자

책을 골라내긴 더 쉬웠다.

동네 중고서점에 들러

나를 유식하게 만들어주거나

우아하게 만들어주거나

소녀감성을 살려주거나 등등의 이유로

골라와 놓고 방치만 해뒀던 많은 책들을

술술술 빼냈다.


그렇게 집에서 퇴출될 아이들은

멀쩡해서 기부하기로 한 것만

라면상자 열 두 개 분량.


아름다운가게에 두 번에 걸쳐서 실어 날랐고

소득공제를 20만 원이나 받았다.


지금 우리 집은?

아직도 비워야 할 것들이 많다.

제 자리를 찾았지만

여전히 빽빽한 옷과 책,

싱크대 문이 살짝 열릴 정도의 그릇들,

핫딜에서 대량 구매해둔 갖가지 생필품들이 그득하다.


하지만 조급해하지는 않으려 한다.

옷과 책은 너무 많이 비웠더니

새로 사려고 하면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또 비워질 아이들인지 점검한다.

대게는 큰 쓸모가 없는 것으로 판명돼

구매욕이 사라진다.


생필품들은 일단 차근차근 사용하고

새로 살 때쯤 하나씩

좀 더 친환경적이고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할만한 것들로

바꿔보려 한다.

세탁세제를 대신할 소프넛이

곧 개봉박두 예정 친환경 살림살이 넘버 원이다.

아차, 구연산과 베이킹소다도 써야지.


집을 비우면서

집이 조금은 넓어졌고

내 마음도 조금은 넉넉해졌다.


나를 매번 흔들어대던 지름신에게도

이젠 대적할 말이 생겼다.

그거 제대로 쓸 자신 있어?


이제는 정말 제대로 쓸 자신이 있는 물건들만 들이려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비워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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