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지 않아

by 유진율

비가 오고 날씨가 더워서 인지 하늘은 더욱 청명해지고 세상의 모든 풍경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저녁을 하려고 부엌에 서 있는데 밖으로 보이는 노을이 심상치 않았다. 붉고 하얗고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서 잘 찍어놓은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어릴 적 나는 아침에 먹을 쌀이 떨어져서 엄마가 끓여준 라면을 먹고 학교를 가는 일이 많았다.

엄마는 오늘만 라면을 먹으라 했지만, 그렇게 아침에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많아져도 나는 오히려 라면을 먹는 그 아침이 좋았다.

철이 일찍 들어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상황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아침에 라면을 먹는다는 사실이 부끄럽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지금은 배가 고프면 밥을 먹을 수 있고, 밥 하기 싫은 날에는 나가서 외식을 할 수도 있고,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제때 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라면을 먹는 아침만큼 행복하지 않다.


남편은 연애할 때 우스갯소리

-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할게, 내가 잘할게.

라고 말해놓고, 시어머니의 폭언과 막말에도 본인 엄마 편을 들며,

-우리 엄마 그런 사람 아니야..

라고 말하고.

본인이 듣기에도 본인엄마말이 심했다 싶으면

-우리 엄마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그래?(그때 연세가 60이었다)

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나를 나쁜 며느리 취급했다.


그래서 내가 암선고를 받자마자, 나는 격분해서 앞으로 내게 며느리도리 바라지 말아라. 난 이제 명절마다 시댁 가고 생신이며 어버이날이며 여름휴가 때마다 시댁 가는 거 그만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땐 알았다.. 고 해놓고 이제 와서 그게 본인에겐 너무 화가 나는 일인건지.. 시댁얘기엔 발작버튼 눌린 사람처럼

-네가 우리 집에 가면 얼마나 많이 갔다고 그런 말을 하냐?

라고 묻는다.


많이 가지 않았니.. 결혼 20년 차 넘었고 안 간 건 고작 4년뿐인데..

정말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안 나왔다.

그래서 지금은 아예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은근슬쩍 넘어가려길래 그냥 모른 척했다.

네 말은 안 들려.. 안 듣고 싶어.


대화를 안 하니. 싸움이 없다.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달려드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괜찮다. 그래봐야 이혼밖에 더 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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