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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루 김신영 Jul 26. 2023

연민과 소망/김주연 해설

김신영의 시집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 시해설

<연민과 소망>

                                                                    김주연     


 하느님 당신이 저를 사랑하신다면

저를 안아주세요 하느님

당신의 그늘 구석에 매몰되어

바람만 맞는 허기진 저를,

-「종이의 가장자리」     


  우리에게 새로운 얼굴로 나타난 시인 김신영은 하나님(시인은 하느님이라고 표기하고 있다)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호소하고 있다. 앞의 인용 부분은 「종이의 가장자리」에 나온 일부분이지만, 그의 호소는 많은 작품 속에 울음을 감추고 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토록 절절히 호소하는가, 아니 하나님이 계시기는 계시고 시인의 사정을 들어줄 만한 처지이신가, 또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과연 이 시인의 편을 들어줄 것인가 하는 의문 비슷한 것들이 동시에 우리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이런 의문은 시인의 딱한 사정, 결국 이 시인의 지적 현실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 내용을 살펴보는 데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1) 나는 달랠 길 없는 나를 끌어안고 백화점 안이며

들이며 길이며 온갖 상품들이 반짝이는

별 됨의 의미를 내색하는 공허한 자리에서

나도 그 속에 섞여 어색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가벼운 섬 2」     


2) 단절된 나의 의식은

욕실에서도 노를 젓는다

빗자루로 나는 정원을 쓸어야 하는

강박관념을 해방시키고

노를 젓는다

아무도 내가 어디를 가는지 알지 못하는데

나는 아직도 욕실에 있는가

-「소리가 있는 정원」     


3) 층층이 불을 단 주택 꽉 찬 신도시는

공주님들 많아도 나의 손 잡아줄 사람은 없다

쌩(生) 자 하느님 보우하시는 신도시에는

주남저수지의 새대가리 철을 따라 이동한다고

신문이 사진에 실려 날아다녔다

나는 어떤 생각도, 어떤 욕망도 없이

어디론지

날아가야 

했다

-「일어서는 땅」     


4) 지나온 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는 제 평생

말할 자유를, 자유를 주실 분 그런 분만 들어주세요

밀리고 밀리면서 너무 많은 사람의 가여운 발자국

하나 남김없이 지웠답니다

지우는 일만 거듭하는 나는 신화처럼

쉼 없이 흔들리며 살아왔어요

-「파도의 꿈」     


5) 나의 기하학적 원근법은

  대비가 맞지 않아 늘 엉망이다

지표면의 단층, 대칭 곡선을

잡아주느라 절망했다

-「신성한 기하학의 확률」     


6) 척박한 땅을 밀어 올리며 영양을 섭취하였다 

엽록소 없는 구차한 기생으로 생존을 이루어간다

동물도 식물도 아닌 균류의 일종으로 살아가는

치졸하고 왕성한 분해능력을 그대 혹시 보았는가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     


  여섯 편의 작품에서 일부분이 인용된 것들인데, 여기에 드러나고 있는 시인의 현실은 거의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자리가 어색하거나, 의식이 단절되어 있거나 아무 생각 없이 떠돌거나, 쉼 없이 흔들리며 살아가거나, 심지어는 자신이 균류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자기 인식이 어디서 오는지 얼핏 보아서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 상황 역시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과 자아는 대위법적 구조 아래 파악되고 있지는 않으나, 적어도 시인 자신 그러한 현실에 무력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인 자신의 현실은 따라서 그 자신만의 독자적인 어떤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객관적인 상황이나 풍물, 타자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매개되고 있는 것들이 훨씬 많다. 시인의 시적 자아는 이들에 대한 관찰, 그 관찰에 대한 정서적∙이성적 반응을 두루 함께 아우른 복합적 양상으로 구성된다. 말하자면 눈->가슴->머리로 이어지는 반응의 순환 고리를 안고서 시인은, 그 고리가 던져주는 현실을 그의 시적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읽어보자.     


1) 역은 최상의 포화 상태, 긴 줄을 세우는 거대한

공포의 특급 놀이시설이 된다 아무도 나갈 수 없다

역무원은 목이 쉰 호루라기를 쉭쉭 불어대로 

더 이상 출구가 없으므로

승객들 일만 분의 일 초가 모자라 아우성이다

-「환승역에서」     


2) 이제 TV는 수상마을을 지난다 

철 케이블에 연결된 마을은 

술에 취한 듯 흔들린다

마을 전체가 강물을 토해낸다

쓰레기통에 잘못 날아든 나비와도 같이

금을 찾으려는 집념은 TV에서도 치료될 수 없나 보다

-「TV에 나타난 그림」     


3) K는 다시 내려오지 못했다 

눈에 먼저 핏발이 서서 터졌고

손가락 발가락 다 터진 숯,

아무도 K를 끌어내리지 못했다

후회할 사이도 없이 2만 볼트 전기는

K를 전신주에 매달았다

-「전신주에 올라간 사람」     


4) 잔디는 단련된 미스코리아의 

몸매같이 아름다운 곡선을 유지하고

글래머 배우처럼 비옥한 대지를 끌어낸다

재벌의 천국은 여기서 누려진다

그지없이 아름답다고 그들은 말한다

-「행복한 그들」     


5) 누구를 위한 핵 폐기이며 원자력 건설이냐 

그들은 거리를 횡보한다

인쇄지에는 두 눈만 뚫린 하얀 두건 쓴

주민들 해골처럼 핵 드럼통 옆에

쓴잔을 마시고 힘없이 흩어져 있다

-「굴업도 사람들」     


  다섯 편의 앞의 시들 인용 부분이 말하고 있는 현실은 1) 출구 없어 보이는 포화 상태의 지하철역 2) TV 화면에 비친 인간의 탐욕 3) 전신주에 매달려 감전사한 전공 4) 돈과 섹스가 감추어진 재벌의 골프장 5) 원자력 건설과 핵 폐기 반대 운동 등으로 요약되는, 우리 주변의 실제 상황이다. 우리 시에서의 현실이란 것이 일반적으로 내면에서 떠오르는 의식과 같은 것 아니면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이라는 점을 환기해 본다면, 김신영의 현실은 훨씬 현실적이며 구체적이다. 무엇보다 가장 현안이 되어 있는 우리 일상의 핵심에 닿아 있다. 이 점에서 우선 이 시인의 현실 인식은 독자적이며 비관습적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훨씬 본질적이라는 사실이다. 지하철이나 TV∙전기∙원자력 등은 2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의 현실을 규정짓고 있는 문명의 알리바이들이다. 돈∙섹스가 어울려 있는 골프장 또한 자본주의의 한 상징으로 간주할 수 있다. 시인의 부정적인 관찰이 아니라면, 이것들은 모두 현대 문명의 발달이 가져온 화려한 성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풍경이 어우러진 모습은 시인의 말대로 “화려한 정원”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사이에 망사버섯을 끼워 넣는다.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

  이 정원을 향한 그의 매서운 눈매는 화려함 속에 은폐된 망사버섯의 서식을 찾아낸다. 그 버섯은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본질은 독이다. 따라서 자기 개인의 내면적인 의식에만 매달리거나 욕망의 표현에서 멋을 찾는 일, 혹은 정치∙경제적 목적과 결부된 현실 개선의 목소리들은 망사버섯을 그대로 방치한 채 정원의 구조 개선이나 내용물의 새로운 안배, 혹은 정원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다는 자의식 따위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반응은 모두 사태의 핵심에 가까이 가지 못한, 비본질적 상황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신영의 인식은 담론적인 서술 형태로 진술 때에나 상상력의 공간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될 때에나 이러한 범주와 수준을 일탈하지 않는다. 현실과 자아 사이의 대립이나 동화도 이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결국, 김신영의 부정적 자기 인식은 그의 개인적인 사정, 예컨대 내면 의식의 소외감이라거나 정치적 좌절, 이데올로기적 회의 혹은 이보다 훨씬 사적인 가정적∙정서적 절망감과 같은 범주에 속한 것이 아님이 밝혀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인식은 심리학적∙사회학적∙정치학적 상상력과는 근본적으로 무관하다. 차라리 그는 철학적∙신학적 상상력의 근원에 접근해 있다. 이 글 앞머리에 인용된 호소 조의 시는 이 같은 인식의 출발점을 강하게 시사한 것이다. “바람만 맞는 허기진 저를” 안아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이하다. 시인은 자신의 자리가 “당신의 그늘 구석에 매몰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자신이 바람만 맞고 허기진다는 이야기는 황폐한 현실과 그 현실 속에 함께 매몰되어 있는 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현실은 겉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시인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부유하게 하지 못한다. 그것이 바람과 허기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객관적 모습 그 자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말하자면 현실에 대한 시인의 비판 의식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불만인가, 원망인가, 자신도 남들처럼 골프 치고 미인과 놀러 다니며 풍성하게 살고 싶다는 것인가. 그런 조건을 만족시켜주지 않는 근본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인가.

  앞서 나는 이 시인의 상상력이 철학적∙신학적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원인을 이데올로기나 제도, 혹은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신에게서 이끌어 낸다는 점을 지적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결론으로 가는 길을 어렵게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은 마치 점쟁이처럼 행∙불행을 예시해 주는 존재며, 세속적인 행복의 보험자로서 그 기능이 끝날 것이다. 시인이 자신의 현실적 불운을 신에게 탓하고, 그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당신의 그늘 구석”은 의문으로 남는다. 이와 관련해서는 신학적 상상력이라고 불러 무방할 몇 부분의 인용이 필요하다.     


1) 기꺼이

신에게로 가까이 가고 싶다

친구여,

내가 가질 수 없는 엿장수의 가위 적 장치를

물결이는 밤마다 요술처럼 마술처럼

내보이며 꿈꾸며,

무거운 고요의 바다

첨벙이며 흔들리며 살찐 하늘 가보고 싶다

(......)

신이 오는 바닷가에 드리운 내 얼굴

그 섬에서 나의 불가사의를 씻고

-「가벼운 섬 1」     


2) 그래 내게 말하여 주세요 그대가 본 것을

신이 숨겨둔 진주를 내게도 보여주세요

-「가벼운 섬 3」     


3) 하느님 당신이 그리운 사람입니다

가슴이 꼬옥 닫힌 사람

구멍 숭숭 난 제 가슴에 아직도 찬 바람만 불어요

당신에게 속살이는 이 말이 들리시나요

-「종이의 가장자리」     


4) 그분은 내가 짓는 초막에 

관심 없음 표시를 해 놓으시고

(......)

산 밑에 소금기 없는 세상에서

하늘을 향해 우뚝 서라고

그분은 돌머리

내 머릿속에 말씀하신다

나는 걱정 없는 산에서 내려가야만 했다

-「초막 짓는 산에서 2」     


5) 나의 굴곡과 내면을 덮는  

하느님의 물세례 내게 있어 다오

그 십자가, 그 언덕 내게 

강 같은 평화로 있어 다오

그 길에 들어서게 하여 다오

-「초막 짓는 산에서 3」     


6) 나의 귀를 그들에게로 갖다 대면서

대목수여 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우리의 소원은?

갈라진 논바닥처럼 갈증에

허덕이며 절망을 하고 있었다

-「신라소 2」     


7) 잘 모르는 낯선 동네의 약국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오직 나를 진리로 인도하고

목마름을 채워줄 그 사람을.

-「생수를 가진 사람」     


  하나님, 혹은 예수를 지칭하면서 쓰인 작품들은 이보다 훨씬 많아서 거의 전 시집에 편재해 있다. 그들의 역할과 기능은, 기독교에서 그렇듯이 여기서도 구원의 기능이다. 물론 구원은 실낙원 이후 죄에 빠진 인간을 건져내어 죽음 대신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초월적 성격의 것이다. 현세적인 삶에서 세속적인 행복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일과 구원은 근본적으로 무관하다. 그러나 구원이란 말은 그보다 훨씬 낮은 범주에서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곤경에서의 탈출도 구원이라는 말로 얼마든지 쓰인다. 김신영의 하나님과 예수는 우선 이런 차원에서의 의미를 띠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시인에게 있어서 차라리 연인의 이미지로 부각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움과 동경의 대상인 것이다. 앞의 인용 부분에서도 1) 2) 3) 4)가 직접적으로 이와 관련된다. 물론 그들이 구원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들은 황량한 현실을 뛰어넘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들이 그런 힘을 갖고 있는 까닭은 시인의 시들을 통해서 실증적으로 혹은 이미지 조작을 통해 밝혀지지 않는다. 그 힘은 순전히 시인의 믿음 안에서 확인될 뿐이다. 애인과도 같은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는 나의 지적은 바로 이러한 구조 때문이다. 이러한 상상력을 나는 신학적 상상력이라고 불렀는데, 상상력이 움직이는 모습을 중심으로 한다면 수직적 상상력이라는 말로 불러도 좋다. 애인은, 그를 사랑하는 자에 의해 그렇게 믿고, 불려지는 것 이외에, 그의 힘에 대한 아무런 객관적 보증은 없다.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예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믿음이 주관적이니만큼, 그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정열 또한 맹목적일 정도로 뜨겁다. 

  “당신의 그늘 구석에 매몰”되어 있다는 불만은, 따라서 객관성 위에 있는 원망이나 비판이 아닌, 순전히 주관적인 불평이라는 점이 여기서 밝혀진다.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망, 그 완전한 세계의 도래를 갈망하는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동경은, 그가 ‘이 자리’를 떠나 ‘그 자리’로 가고자 하는 비상의 욕구다. 그 비상, 즉 날아감에는 어떤 조건이 없다. 날개가 있어야 한다거나, 날아갈 만한 자격이 있다거나 하는 조건이 없는, 소망으로만 충만한 것이다. 더욱, 그것이 하나님인 경우 그들 믿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로 가는 일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일이 이미 약속되어 있는 터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과 예수 재림의 기다림은 무모하거나 무용한 동경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동경으로 시의 모티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자리’의 황량한, 모순된 현실 때문이리라. 특히 모순이야말로 모든 약속을 굳게 믿는 시인으로서도 문득문득 혼란스러운 현실 인식을 갖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그 모순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독신(瀆神)의 마음까지 품게 할 수 있는 이상한 섭리로 비추어진다. 그 가장 비근한, 그러면서도 가장 큰 예 하나: “내 마음 하나 비우지 못해 길을 걸었다”(p.39)에 나타나는 자기 스스로의 모순이다. 이미 구원받은 자,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자로서도 유혹과 욕망을 저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믿으면서도, 그렇다면 나 하나 완전하게 못 해 주는가 하는 갈등, 자신의 연약함∙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시인은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이다. “당신의 그늘 구석”이란 결국 불평 아닌 자기 연민의 다른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김신영의 시의 매력은,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예수에 대한 애틋한 연민을 그리면서도 그것을 타락한 현실과 대비, 도식적인 이원론으로 몰고 가지 않는 그 절묘한 복합 공간에 있다. 이 절묘함은 시인 자신의 헌신적인 자기 개입에서 비롯된다. 흔히 종교적∙이데올로기적 이념∙신념 경향의 시들에서 시인은 그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우렁찬 강론 조의 목소리들만이 들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집은 그 분위기와 멀리 떨어져 있다. 오늘 우리 현실이, 새로워져야 할 숱한 부정적 요소로 미만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인은 그것을 몇 가지의 단순한 빛깔을 통해 타락한 세계라고만 타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시인 자신이 숨 쉬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시인 자신이며, 시인 자신이 동시에 현실이다. 이 동일화 Identification 현상은 시인 자신의 자리를 낮추어, 시적 자아의 설득력을 얻게 하는, 이 시집 최대의 덕목이다. 이 덕목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부르고 그에 접근하고자 하는 열망이 단순한 개인적 구원 차원이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경지로 확대된다. 그것은 포화 상태의 지하철역에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 혼돈과 어려움을 풀어달라는 구체적 호소와 연결된다. 종교 행위와 예배 속에서의 이기적 참여 아닌 이웃과 전체에 대한 숨겨져 있는 사랑, 공동체 모두의 구원을 더불어 아우르는 폭넓은 기원이다. 

  끝으로 하나: 꽃, 혹은 노래다. 이 시인이 종교적 믿음과 열망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옆에 혹은 그것을 껴안고 있는 시인이고자 하는 이유의 저 깊은 속에 피어 있는 것들, 그것들은 어쩌면 하나님의 세속적인 모습인지도 모른다.      


  폭발하듯 피던 진달래까지

  꽃 하나 피워주실 분 안 계신가요

  꽃 하나 들고 계실 분 

  제게 꽃 얘기를 해 주세요

  아름다운 꽃 얘기를.

-「서울은 꽃 하나 길섶 위에 」     

  

  (..) 내 그리움 훌훌 털어낼 수 있다면 더 슬픈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된다면 

끝없이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없어도 된다면 나아 그 길에 있고 싶어 그 길에

내 노래 하나 무덤을 만들어놓고 무심하게 앉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거리에서」

     

  그러나 아직 김신영의 꽃도, 노래도 어떤 지배적인 이미지나 일정한 기능을 갖는 수준은 확보하고 있지 않다. 타락한 세상과 구원 사이의 엄청난 공간이 어울려 역동적인 세계를 만들고 있는 그의 시는, 앞으로 보다 집중된 시의 사물을 통해, 자신만의 상상력을 보다 아름답게 훈련시켜 나가야 할 과제와 만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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