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영 시인
신념에 연풍불어
-겨울 문장
1
첫눈이 발자국 무늬 없이 이불이 되는 밤
겨울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밤이면 휑한 구석으로 더 많이 불어
눈 이불마저 여지없이 헤쳐 놓는다
내리는 눈을 따라 줄어든 살림을 짚어
빠르게 읽어가는 이 길
어젯밤에는 오랜 신념에 연풍이 불어
통나무집에서 남루해지도록 악물고 있다가
신념도 이불이 될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겼다
손이 찬 나를 데리고 칩거 중이던 책을 펼쳐
인생의 아득한 순간을, 찬란했던 순수를 가늠하고
파란이 일던 지점의 빼곡한 행간, 밑줄을 읽는다
그 두께만큼 지나온 인생인데 아직도 밑줄에서 머뭇거리고
세상 풍진에 길들어 흔들리다 밟히는
행색이 남루하고 초라하여 엄폐물을 찾고
다급한 바람의 기억은 오래전부터 꽐라인 듯
좀처럼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2
인생은 이만큼 먹여주고 입혀준 천 리의 물살에
팽나무 같은 두께를 주며 조용히 다녀가는 것
모던한 인생이란 모로 누워 바람처럼 읽어가는 것
나직하게 읽어 내릴 어깨가 찾아오지 않는 밤
아직 이불속에는 찬바람이 꼭꼭 들어차 있다
그래, 행복은 왜 그리 느리게 오는지
몇 개의 계곡을 건너 냇물을 따라오는지
어느 골목에 들러 도란거리는지
외딴 담벼락에서 아이들이 드잡이 하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바람을 흉내 내어
한 움큼 세월의 멱살을 움켜쥔다
너무 늦게 오는 행복의 나라로
해를 받으며 노래하고 길을 걷는다
밤으로 가는 시간이 길어지면
귀퉁이가 닳아빠진 책에서
행복 찾기에 골몰하고
3
그렇게 절판된 책을 열흘씩 끼고 있으면
절망의 페이지가 노래하고 말소된 영혼이 춤을 추는데
오늘 기울어진 저녁을 먹고
거친 바람을 맞으며
이불을 당겨 덮고
이를 악물고 그렇게
석 달 열흘을 웃을 수 있다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 문집 (청색종이, 2019.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