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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루 김신영 Jul 31. 2023

백골이 진토 되어

김신영 시인

<백골이 진토 되어>

     

눈비가 오는 날에 기침 소리 쏟아지고

피로 먼지와 모래를 털면 오랜 믿음이 흘러나온다

남루를 채색한 오늘은 어디까지 갔나

흐린 하늘을 밟고 온 두 발에 겹겹이 끼인 시간이 

깨끗이 씻겨지는 저녁이다     


해가 지면 조롱거리가 되어 버린 

정의가 순한 손발로 마주 앉는다    

 

그래 아직은 우리가 다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지? 그렇지?

글쎄 이 세상에 진 빚을 다 갚을 수 있다면야 

정의는 우리 편이지 우리는 다정한 친구지

백골이 진토 되어도 갚지 못할 

억 빚을 지고 있는데 그게 정의가 되겠어?     


지금은 우리를 위하여 다정한 저녁이 왔으니 

이걸로 파란 많은 오늘을 마감하면 안 되나?

감사에, 거룩한 양식과 붉은 과일을 식탁에 올리고

하얀 이밥에 사랑을 얹어 먹으면 안 되나? 


무슨 말씀을, 그 많은 빚을 안고  

편하게 식탁에 앉아 이밥을 먹다니 가당찮아     


그래도 위로받고 싶으니 사랑을 얹어 한 입 가득 주신다면

이 만찬, 밥풀 한 알까지 맛있게 먹을 텐데


고단한 하루, 수고에 수고를 더했으니 

어디 그대의 짐을 식탁에 풀어 봐     


달세를 물어다가 이 궁전에 모두 다 바쳤고 

이자가 나를 물어다가 은행에 제물로 바쳤어 

하늘 아래 별처럼 빛나는 궁전이잖아

아름답게 흐르는 여울, 찬란한 다리 옆에 보석 궁전 

가끔은 강물이 아롱져 노래가 들리는데 


강가의 나무가 춤을 추면 활자도 춤을 추었는데

이제는 빚이 칼춤을 추느라 나는 뒷전에 있네     

이제는 빚이 한가운데로 여울져 흐르네


그러니까 혼신을 다해 

순하고 따뜻한 저녁을, 극진한 만찬을 

힘껏 밀어내야 하는 거지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 문집 2019.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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