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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Feb 19. 2021

가끔 인생을 되돌아봐야 한다

정지하지 않는 시간은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거울이다

관악산에 올랐다. 사당역에서 출발해 연주대에 우뚝 섰다. 시원한 바람에 땀이 식고 몸이 차가워졌다. 준비해 온 과일과 간식거리로 출출함을 달래는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주말 산에는 유난히 사람이 많다. 새들의 지저귐은 노래와 같다. 바위사이에 피어있는 돌양지꽃은 소박한 게 참 예쁘다. 높이가 5cm 정도에, 꽃의 직경은 1cm나 될까. 

우리는 하산 길을 새로운 코스로 가기로 했다. 서울대학교 쪽으로 내려가 빈대떡을 안주삼아 막걸리 한 잔과 함께 하는 뒤풀이를 위해서. 일행이라고 해봤자 2명에 불과한 나와 동료는 다른 사람들과 줄지어 내려오다가 어느 순간 둘 만이 남게 됐다. 잘 가던 발길이 불현듯 벼랑 앞에서 멈춰 서고는 뒤돌아오기를 몇 차례. 마음이 조금 바빠졌고, 근심이 뭉쳐지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말했다. “아무래도 길이 보이지 않아요. 되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을 했지만 내려온 길을 올려다보니 다시 가는 것 역시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움직였다. 숲속을 한참동안 걸어가서야 얼추 바닥에 사람이 다닌 흔적이 보였다.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처럼 되돌아 갈 수 없는 엄청난 속도의 과거가 지나갔다. 사람이 보통 걷는 속도에 불과했지만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앞만 보고, 길을 찾을 뿐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의 방향이 그래왔다는 것을 느낀 건 뒤풀이 장소에서 걸어온 길을 복기했을 때였다. 직진이었다. 어떤 목표든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우회하는 것은 시간낭비라 여겼다. 보통 사람의 심리가 그렇다. 주변의 간섭과 방해 요소에도 아랑곳없이 직진으로 삶을 꽉 채운다. 

인생은 직진이다. 분명 맞다. 하지만 놓쳐서는 안 되는 게 있다. 바로 멈춤이라는 속도의 조절이다. 버스가 정류장에서 사람을 내리고 태우듯이 직진과 멈춤의 반복이 바로 숨가뿐 호흡의 조절이다. 

인생에도 정류장이 필요하다. 정류장에 멈춰 섰을 때 고뇌를 내리주고 희망을 태우는 것이 인생의 지혜이다. 삶은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야 아름답다. 고속철도가 생겨 완행 기차가 인기를 잃었지만, 사람들은 가끔 완행에 몸을 싣고 싶어 한다.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의 가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디게, 천천히, 시나브로 가는 삶은 굼뜨지만,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더 잘, 더 많이 볼 수 있다.

유자효 시인의 시 ‘속도’는 이렇다. “속도를 늦추었다/ 세상이 넓어졌다// 속도를 더 늦추었다/ 세상이 더 넓어졌다// 아예 서 버렸다/ 세상이 환해졌다.”

잠시라도 멈춰서면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한다. 바쁘게 사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쉬고 있으면 불안한 까닭이다. 속도에만 빠져있는 지금의 삶을 완행 수준으로 운영하면 시야가 넓어지고 비로소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어 또한 좋다. 

일본의 환경운동가 쓰지 신이치는 “씨앗이 자라는 속도를 넘어서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무엇보다 꽃이 피는 속도를 넘어서지 말았으면 싶다. 급행이 아닌 완행의 속도로 천천히 걸어야 꽃이 보이고, 나비가 보이고, 꿀벌들이 보인다. 천천히 걸어야 이 세상의 많은 꽃들이 피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금껏 모르고 지나쳤던 꽃들이 눈 속으로 서슴없이 뛰어 들어온다. 빨리 달리면 멀리 갈 수는 있지만 시야는 좁아진다. 천천히 걸으면 거리가 짧아지는 대신 시아의 폭이 넓어진다.

한 후배가 있다. 그녀의 삶처럼 꼬이고 꼬인 게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굴곡지게 살아왔다. 결혼 1년이 안 되어 이혼한다. 연하의 남자를 만나 재혼을 한다. 잘생긴 사내 아이 하나를 둔다. 정성껏 입히고 먹이며, 자신이 어린 시절에 받지 못했던 사랑까지 아이에게 보태준다. 그녀는 다시 이혼하고 만다. 두 번째 이혼이다. 흉기를 가지고 무자비하게 위협하는 연하남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않으면 자신이 죽음을 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이도 엄마에게 도망가라고 했다. 그녀는 또 다른 남자를 만났다. 자신이 없었지만 좋다고 하는 순진한 남자의 사랑을 거부할 수 없었다. 세 번째 결혼을 한다. 그는 일본에서 정치학석사를 마쳤다. 하지만 빈털터리였다. 둘은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간다. 비빌 곳이 없는 그녀와 그는 ‘늦’사랑이라는 양식으로 살아가지만 벅차다. 그래도 지금껏 잘 살고 있다.

나는 후배를 생각했다. 그녀의 살아온 과정을 퀴퀴한 지하 극장의 흑백 영사기를 돌리듯 훑었다. 지난날 그녀가 했던 말 한마디가 생각났다.

“선배! 인생에서 일정한 주기를 정해놓고, 회사에서 업무성과를 분석하듯이 살아온 과거를 파헤쳐서 문제점을 찾아내고, 그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가진다면 인간의 삶은 좀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나 역시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발등에 불을 끄는데 혈안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후배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 삶의 속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 그래서 마음속에는 인생을 통과하는 구간별 시간을 정해놓고 바로 그곳에 속도제한 표지판을 세워 놓는 거다. 서른 살이면 시속 30km, 마흔 살에는 시속 15km, 오십 살이 되면 10km, 육십 살 때는 5km. 인생을 한 권의 책이라고 가정할 때 너무 빨리 넘기면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 법이다.”

불타는 사춘기를 맞이한 중학생 자녀가 있다면 이 말에 익숙할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 부모한테는 말문이 막히고 가슴을 치게 하는 말이다. 일상에서 작고 사소한 말들을 수도 없이 듣고 뱉지만 이 말처럼 가슴을 후벼 파는 게 또 있을까 싶다.

내가 알아서 한다는 말은 결국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다. 중학생은 어른이 된다. 그리고 과거를 후회하게 된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 시간의 순환으로 이 말을 자녀들한테 듣고 나서다. 뼈 속까지 후회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알아서 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단지 그 말은 귀를 통하지 않고 가슴으로 온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정지하지 않는 시간은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거울이 되곤 한다. 자식은 부모가 되고 부모는 자식한테 편입할 수밖에 없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라는 말이 들려올 때 시간을 내려놓아야 한다. 어쩌면 이 순간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적기(適期)일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알아서 한다고!”는 “시간이 알아서 한다고!”와 같은 말 일거다. 

세월은 주변을 알아볼 수 있게끔 사람을 성숙시킨다. 성숙함으로 세상의 바뀜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내가 알아서 한다고!”라는 말은 시대만을 달리할 뿐 계속 살아있다. 앞으로도 중학생을 두고 있는 부모는 듣게 될 것이다. 

시간을 담아낼 수 없는 그릇은 무용지물이다. 세상의 시간을 모두 담아도 비워있는 그릇이 필요하다. 그 그릇에 아팠던 소리를 담고, 슬펐던 과거를 담고, 가슴 쓰라렸던 경험들을 담아야 한다. 그러면 그릇은 위대한 일상을 담아내고, 가치 있고 고유한 우리 삶의 전부를 빛나게 할 것이다.미국의 배우 겸 가수 에디 캔터는 말했다. “속도를 줄이고 인생을 느껴라. 너무 빨리 가다 보면 놓치는 것은 주위 풍경뿐만 아니다. 내가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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