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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Feb 19. 2021

이름을 꽃처럼 기억시켜라

이름, 그 만큼의 언어로 불리는 우리여야 한다

어두워질수록 빌딩의 빛은 밝아지고 있다. 강남역의 휘황찬란함은 밤의 열정보다 강해 보였다. 남들은 불금을 예약하고 삼삼오오 움직였다. 그녀도 책상을 재빨리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바삐 가야할 곳이 있었다. 택시를 잡기 위해 큰길로 나갔다. 

얼마 후 택시 한 대가 슈융 소리를 내며 빠르게 지나갔다. 빈 택시 인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욕이 나왔지만 참았다. 입을 오염시키기 싫어서다. 시계바늘이 억만번을 돌아간 후에야 택시가 그녀 앞에 섰다. 서슴없이 뒷자리에 앉았다.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쇼 앤드 텔이라고 아니?”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가 휴가를 맞아 서울에 왔고, 친구를 만난 자리였다. 갑자기, 뜬금없이 친구가 그녀에게 내뱉은 질문이었다.

“음, 그게 뭐야?”

“쇼 앤드 텔(Show and Tell)은 새로운 사람이 자기를 소개하는 거야! 일테면 전학을 온 아이가 급우들에게 특별히 자랑거리를 나누거나 자기를 소개하면서 쉽게 친해질 수 있도록 하는 거지.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야.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자기를 알리거나, 새로운 한 주가 시작하는 월요일에 쇼 앤드 텔을 하면서 한 주를 시작하기도 하지!”

생소한 용어였고 낯설었다. 친구 역시 미국에서 첫 경험했던 쇼 앤드 텔 사건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났다. 이사하고 나서 적응을 위한 험난한 시작에 대한 설명이었다.

“쇼 앤드 텔. 쉽게 말해서 ‘쑈 쑈 쑈’의 포맷과 같은 거구나. MC 이덕화가 느끼한 목소리로 ‘부탁해요!’ 하면 가수가 등장하여 노래를 시작하듯이 말야.”

‘부탁해요!’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게 쇼 앤드 텔이다 말이지. 

친구와 대화가 암연 속으로 사라지면서 그녀한테는 기억하기 싫은 장면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매 신학기 초만 되면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불편함과 괘씸함이 함께 찾아왔다. 출석부에서 그녀의 이름이 불러질 때 마다 그랬다.

“‘임신중’이 뭐니, ‘임신중’이.”

“언제까지 임신 상태야. 차라리 ‘임신애’로 바꾸면 어떨까! 애를 임신한 임신애.”

“아니면 ‘임신남’은 어때. 남자가 임신하는 미래가 올 수도 있잖아.”

“그것도 맘에 들지 않으면 ‘임신술’은 어떠니? 애 낳는 것만큼은 독보적인 기술자가 되는거야.”

참 많이도 놀림을 받았다. 부모 원망도 많이 했다. 울어도 보고, 놀리는 친구들과 싸워도 봤다. 하지만 ‘임신중’은 출산 기미는 전혀 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여전히 ‘임신중’이다.

그녀는 도저히 답을 없을 때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써보기도 했다.

“국회의원 홍준표 이름은 ‘홍판표’였어. 김시발, 고추서, 손낙지, 안테나, 성기왕, 박양념, 고기판, 고오환, 정세균, 웃기는 짬뽕 같은 이름이 얼마나 많은데….” 

결국 그녀는 개명했다. 지금은 ‘임미희’로 불리고 있다. ‘임신중’이라고 불렀던 친구들도 미희라고 불러준다. 미희로 불릴 때 마다 그녀는 생각했다. ‘임신해’가 아니길 얼마나 다행인가. ‘임신해야 한다면서 아무나 달려들었으면 어쩔 뻔 했나’고.

웃긴 이름이 고마울 때가 있다. 어릴 때 친구들은 수십 년 만에 만났는데도 모두 자기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내와 엄마로 살아오다 보면 자기의 이름은 잊게 되는데 말이다. 

“지금 ‘쇼 앤드 텔’을 한다면 이름 하나 만으로도 제대로일텐데, 이젠 이름마저 소개할 자리가 없는 인생이 돼버렸네.” 그녀는 물건을 구입하고 비용을 송금할 때 송금인 ‘누구누구 엄마’라고 썼던 경험을 기억해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자조적인 웃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송금인 임신중, 아니 임미희!

이 세상에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특히 사람은 이름의 역할이 더욱 커졌다. 자기를 드러 내는 첫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명이나 가명으로 자기를 광고하는 사례들이 많다.

어떤 부동산 컨설턴트의 필명은 ‘붇옹산’이고, 한 펀드 매니저는 ‘고수’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이처럼 정신을 바짝 차리게 불리어지는 이름으로 승부를 걸어야 성공한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전문가 집단에서 피를 말리는 경쟁을 하다 보면 이름을 가지고 ‘쇼 앤드 텔’이 필요하다.

시인 김춘수의 <꽃>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본죽은 제품 이름을 바꿔 대박이 났다. 바로 불낙(不落)죽이다. 본래 매운 낙지죽인데, ‘떨어지지 않는 죽’이란 뜻이 통하면서 수능시험 시즌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의 공격수 손흥민 선수. 스포츠 TV 진행자는 물론 수많은 영국의 축구팬들은 그를 응원할 때 ‘Sonsational∼’이라고 외친다. ‘Sensational’의 ‘Sen’을 손 선수의 성(姓)인 ‘손(Son)’으로 바꿔 외치면서 그를 응원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중국인 관광객들이 서울에서 즐겨 찾는 곳이 이화여대다. 정문 옆에 장식된 배꽃 조형물이나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모습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학교 안으로 들어 와 곳곳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다. 배꽃은 뜻하는 이화(梨花)라는 이름 때문이다. 이익을 뜻하는 이(利)와 ‘피어오르다’ ‘발생시키다’라는 말인 발(發)의 중국어 발음은 리파(利發)다. ‘돈을 번다’는 리파와 이화의 발음은 똑같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사람의 주변에는 사람이 넘쳐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의식적으로 내 사람을 만들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내가 먼저 그의 꽃이 되어 줘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친구에게 먼저 해줘야 친구는 내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사람은 싫어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의 이름을 결코 허투루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이름을 왜곡하여 부정적이거나 웃기는 별명으로 폄하한다. 그 ‘임신중’처럼. 그만큼 이름은 요긴하고 필수적인 사람의 요건이다. 이름을 꽃처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논어(論語)의 자로(子路)편에서 공자는 정치를 하게 된다면 무엇을 먼저 하겠느냐는 제자 자로의 질문에 ‘반드시 이름을 바로 잡겠다’(必也正名乎)라고 했다.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탄치 못하고, 말이 순탄치 못하면 일이 이뤄지지 못하고, 일이 이뤄지지 못하면 예와 악이 발흥하지 못하며, 예와 악이 발흥하지 못하면 형벌이 올바르지 못하고, 형벌이 올바르지 못하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 대상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부여하고, 그것을 온전히 부르고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름, 그 만큼의 언어로 불리는 우리여야 한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이름. 이름이라는 나의 가치가 오래될수록 우리는 힘을 많이 발휘하고, 자신을 지키는 힘으로 되돌아 올 수 있다. 그것이 우리들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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