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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Sep 16. 2022

제비처럼…

제비처럼 지혜롭고, 정이 있고, 의리가 있는 삶을 살아야한다

처마 밑은 아늑하다. 집이 누추하더라도 그렇다. 누구의 집이든 그럴 것이다. 제비집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처마 밑 제비집은 갑자기 쏟아지는 여름 소나기를 피할 수 있다. 처마 밑 작은 집은 온몸을 불덩이로 만들고도 남을 한여름 땡볕의 무수한 공격도 언제나 시원하게 막아 준다. 

또 바람은 어떻고.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 역시 피할 수 있다. 수십억 원이 넘는 강남의 아파트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제비는 이렇게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에 집을 짓는다.

그렇게 몇 해 전 지어놓은 평화로운 집에서 살던 제비가 다시 돌아왔다. 올해로 6년째다. 천장을 받치고 있는 붉은 벽돌 기둥에 보금자리를 짓고 단란한 식구를 만들어 살다가 떠난 제비다. 

나는 “박씨라도 물고 왔냐?”고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돌아온 것만으로도 귀하고 복된 선물이니까. 고향을 찾아오는 정이 많은 친구처럼 제비 부부는 연신 입으로 조잘댄다. 마치 안부 인사를 길게 하는 것처럼, 지지배배 지지배배. 자연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만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은 없다.

집을 지은 지 2년째 됐을 때 제비는 이미 지어 놓은 집 옆에 또 다른 집을 지었다. 그래서 처마 밑에 제비집이 두 곳이 됐다. 다주택 제비 가구다. 제비는 복(福)을 가져다주는 새(鳥)로 인식됐으니 나는 이미 다복을 받은 것과 같다.

올해도 여전히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제비를 보는 재미가 솔찬하다. 옛날부터 제비 사랑은 각별했다. <흥부놀부전>이 그랬고, 제비에게 해를 입히면 학질에 걸린다고도 했다. 사람과 공통되게 지(知)·정(情)·의(義)를 가진 동물이 제비라고 일컬은 이도 있다. 

제비는 여름 동안 한 둥지에서 번식을 두 번 한다. 신기하게도 두 번째 출산은 다른 둥지에서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처마 밑에 둥지가 2개가 된 것임을 알게 됐다. 

둥지 아래에는 제비의 배설물이 쌓인다. 집을 짓는 과정에서는 습기 품은 흙 부스러기와 지푸라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직원은 매일 아침 출근과 동시에 바닥을 물청소한다. 그런데 그녀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변의 색깔과 농도를 보니 오늘도 건강이 좋아!” 그녀 역시 제비를 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전혀 귀찮아하지 않는다.

제비는 둥지를 틀면 보통 4~5개의 알을 낳고, 알에서 깨어 나와 새끼가 되는 데는 약 3주가 걸린다. 그 후 새끼들은 부모 제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비상하는 훈련을 받는다. 초기 훈련 과젱에서 새끼들이 날아가는 곳이 집 주변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다가 훌쩍 날아다니는 시간이 길어지고, 공간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결국 제비 새끼들은 둥지를 떠난다. 새끼가 떠난 후 제비 부부는 다시 사랑을 시도하고, 두 번째 부화 과정에 들어간다. 

오래전부터 제비는 인간과 친숙하다. 조금 특이한 경우다. 통상 야생 동물은 사람을 피하기 마련이다. 해를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비만큼은 예외다.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사람 곁에다 집을 짓는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서 새끼까지 낳고 기른다.

바로 제비의 지(知)다. 이것은 제비의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할 수 있다. 사람 가까이 집을 짓다 보니 정작 제비는 다른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받는다. 사람이 두려워 다른 동물들이 다가올 수 없으니 짐승이 제비를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이이제이가 제비의 생존전략인 것이다. 또 제비의 먹잇감인 날벌레는 자연 상태보다는 인간의 주변에 더 많다. 먹이를 확보하는데 유리하다. 제비는 현명하다.

제비는 길지(吉地)를 알고 있다. <흥부전>에서도 제비는 흥부의 수차례 타박에도 기와집을 마다하고 초가집에 결국 집을 짓는다. 어쩌면 좋은 기운을 품고 있는 집터를 제비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많은 알을 낳아 새끼를 얻을 수 있다. 제비는 종족 번식의 의지가 강하다. 

전래동화 <흥부전>에서 착한 흥부에게 금은보화를 가득 안겨주었고, 나쁜 놀부에게는 징벌을 내렸다. 본성이란 무엇인가. 자연과 세상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부여받은 천생적 성질이다. 사람을 포함한 동물들은 자연의 원리로 본능적으로 삶을 살아간다. 야생동물과 달리 인간은 본성이라는 사명 위에 사리사욕을 채워 가려 한다. 

바로 놀부가 그렇다. 그런 놀부를 혼내주고, 착한 흥부를 도와주는, 그것이 바로 제비의 정(情)이다. 제비는 지나친 욕심을 경계한다. 배려의 교훈을 일깨워 준다.

제비는 의리(義理)가 있다. 해가 바뀌어도 자기가 태어난 곳은 다시 찾아온다. 제비는 “내년에 보자!”는 전셋집 주인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듯 때가 되면 반드시 돌아온다. 언제든 고향으로 돌아오는 제비의 귀소본능은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인간들과 사뭇 다르다. 결코 제비는 감탄고토(甘呑苦吐)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제비는 익조(益鳥)다.

가수 조영남이 불렀던 <제비>라는 노래가 있다. 멕시코 민요인 <La Golondrina>가 원곡이다. 노래 가사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먹구름 울고 찬서리 진다해도/ 바람 따라 제비 돌아오는 날/ 고운 눈망울 깊이 간직한 채/ 당신의 마음 품으렵니다./’ 

돌아온 제비처럼, 지정의(知情義)로 세상을 품어야 한다. 한참 제비의 꿈을 꾸고 있을 아내가 화분 하나를 건넨다. “사무실에 놓고 잘 키워 보세요!”

나는 책상 위에서 풍수지리에 맞춰 길지를 찾았다. 적재적소라고 생각하는 자리에 화분을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렀다. 한 잎 두 잎, 파란 잎들은 어느 순간부터 누렇게 변하고 있었다. 사랑의 상실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세상은 사랑의 굴레 속에서 희망과 행복을 자라나게 한다. 제비를 향한 사랑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그 사랑은 화분한테까지는 미치지 못했나 보다. 화분이 사랑을 강요하지 않았고, 부탁하지도 않았고, 나아가 애원하지도 않았기 때문인가.

인간의 사랑은 보통 가까워지면 소홀해진다. 바로 눈앞에 놓여진 화분이 그랬다. 화초에 물주기가 쉬운 일이다 보니 방심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칭찬이나 사랑을 표현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착각과 표현을 생략해도 된다는 믿음이 배신한 경우와 같다. 사랑하는 마음을 알아 주려니 하고 믿는 구석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끼리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새삼스럽고 쑥스럽다고 생각하는 경우와도 같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풍부한 표현으로 내 마음을 전하는 일은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이다. 구체적인 사랑 표현으로 서로가 더욱 돈독해지고 따뜻해질 수 있다면 열 번이라도 더 할 수 있는 용기와 배려가 있어야 한다. 

매일 아침 직원이 제비의 배설물을 치우면서도 제비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 화초의 잎이 누렇게 되기 전에 갈증을 달래줄 수 있는 물을 건네듯 화초에 물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올해도 변함없이 제비는 때가 되면 떠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다시 기대할 것이다. ‘내년도 올 때 박씨는 물고 오지 않더라도 너는 꼭 또 와!’라고. 

나는 6년째 깨닫고 있다. 제비처럼 지혜롭고, 정이 있고, 의리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왜냐하면 삶의 구석구석에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제비의 반짝이는 날개짓은 우리한테 사라졌던 사랑이 다시 돌아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내년에 펼쳐질 제비 식구들의 축제를 벌써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참, 제비꽃의 꽃말은 ‘순진한 사랑’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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