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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Jun 13. 2024


아름다운 인생의 연출은 내가…

꽃처럼 살면 기쁨과 감사가 예쁘게 피어날 것 같다

지인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중동 근로자로, 말년에는 다세대주택 계단 청소와 1톤 화물차를 직접 운전해 폐지와 고철 등을 수집했다. “나이가 있는데, 너무 힘들게 살지 마시라!”는 덕담에도 그는 하던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이유는 자식들한테 쌈지돈 이라도 남겨 주고 싶다는 거였다. 

    

지인이 가끔 했던 넋두리에 따르면 남편은 평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가끔 폭력을 휘두르고, 거칠고 과격한 말투, 하물며 결혼한 딸아이의 땀을 때릴 정도로 인내심의 크기가 작았다고 했다. 그가 젊었을 때 일했던 중동 사막의 모래알처럼 가족의 일상은 쉽게 뭉쳐지지 않았다고도 했다.      


“때로는 폭력으로, 깨진 유리 조각 같은 말 습관으로 우리를 괴롭히면서, 선뜻 남편은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것처럼 보였는데, 암은 왜 걸렸다요?” 지인의 넋두리가 안타까웠다. “눈물은 왜 끊임없이 나오는 건지….” 굵은 눈물이 지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몸속으로 쌓았던 모양이지요. 누군가에게 하는 행동이 ‘긍정’의 형태가 아니라면 그의 스트레스는 상대방의 그것보다 훨씬 크지 않았을까요? 세상의 순리라는 것이 거슬릴 수 없는 법이면서도 종종 예외라는 것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위로가 그에게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아 보였다. 유교적 규범을 바탕으로 살아온 삶이 생경하지 않아서일거다. 편견과 강제가 내외부의 적이 되는 세상 속에 있으니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다.     

장례식장을 나오면서 스트레스의 보시(布施)를 생각했다. 오래전 어느 스님이 “아낌없이 나누는 보시가 진정한 비움”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스님은 길에서 나눠주는 광고 전단지 한 장도 귀하게 받는다고 했다. 스트레스가 스님 손에 쥐어진 전단지처럼 쉬운 비움이었으면 좋을텐데….  

   

주어진 삶은 무겁고, 팍팍한 생활이 쉼을 압박하고, 생각의 줄기들이 복잡하게 혼합되고, 보통 사람들의 삶이 이러하다. 어느 인생이 고해가 없을까. 삶이 고통일지라도 극복하며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인생에서 2분법은 없다. ‘이래서’가 절반, ‘저래서’가 절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곧 다가올 더위는 추위가 물러나서인거고, 낯과 밤의 차이는 빛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마음을 잘 쓰면 인생은 아름다움의 크기가 추함의 비율을 줄여줄 것이다. 나는 지인의 장례식장에서 철학자가 된다.      


사람은 걸어온 길을 끊임없이 뒤돌아보곤 한다. 그래봤자 남는 건 후회뿐인데도 말이다. 후회를 등지고 다시 길을 걸어가는 것이 또한 삶이다. 뚜벅뚜벅 걸어가며 차곡차곡 없는 희망을 끄집어내 마음에 쌓는다. 때로는 희망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보통 우리들의 삶이 그러함의 반복이다.     


한평생의 노트에 그려진 명령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찌보면 순리이면서 삶의 방향이다. 그러다가 떠날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 인생이고. 그러니 뒤를 돌아보고, 설령 후회일지라도 웃어주면 어떨까 싶다. 인생의 길이란 도망갈 수 없는 곳에 있으니까.     


꽃처럼 살자, 라고 생각해본다. 꽃처럼 살면 기쁨과 감사가 예쁘게 피어날 것 같다. 개나리와 벚꽃이 그리워질 법하니, 어느 순간 그 자리를 빨간 장미가 차지하고 있다. 인생도 다르지 않다. 한켠이 비워질 때면 다른 무언가가 채워준다.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을 읽고 행복의 정의에 놀랐었다. 행복심리학자인 서 교수의 ‘행복론’은 이랬다.     


‘행복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라고 강조합니다. 행복은 쾌락에 뿌리를 둔, 기쁨과 즐거움 같은 정적 정서라는 것이지요. 이런 경험은 본질적으로 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철학이 아닌 생물학적 논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행복의 핵심은 한 장의 사진으로 담는다면, 저자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라고 했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은 이 장면이 가득한 인생 대 그렇지 않은 인생의 차이라고 말한다. 서 교수는 “행복하려면 가족, 친구와 산책 나가고 수다 떠는 경험을 매일 하라.”고 했다. “인생은 쇼가 아니다”라고도 말했다. 인생이 쇼가 되면 승산이 없다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행복도 불행도 결국 사람을 통한다. 행복은 크지도 작지도 않고, 거창하지도 않다. 그래서 서 교수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굳이 먼 곳에서 행복을 찾을 필요가 없다. 뒷사람이 들어올 때 웃으며 문을 잡아주는 작은 경험만 쌓아도 서로의 행복도는 높다.” 스님이 전단지를 받아주는 것과 같은 결이다.     


인생을 돌아보면 용서를 해줬던 일보다는 용서를 받은 일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감사를 받았던 일보다는 감사를 표했던 일들 역시 더 많았다. 사람들은 현재를 바라보고 있어 과거에 대한 것들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래서 용서를 받았던 일들을 망각하고, 감사를 말했던 일들을 잊어버린다. 하지만 용서했던 일보다는 용서를 받았던 일들을, 감사했던 일보다는 감사를 받았던 일들을 기억에서 놓치지 않을 때 인생은 훨씬 행복해질 것이다.  

   

‘생래적(生來的)’이라는 단어에 꽂혔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는 태어나면서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인생을 좌우한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경험들이 늘어나면서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노력과 의지가 ‘생래적’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인생의 무게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노력과 의지의 크기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 행복과 슬픔의 크기 역시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 만은 공평하다. 행복의 재료들을 찾아 스토리를 만들어갈 때 아닐 것 같았던 삶들이 자리를 잡아간다. 단지 노력과 의지의 차이가 기대하는 삶의 호불호를 견제한다. 그러니 걱정하지도, 스트레스를 받지도, 낙담하지도, 말아야 한다. 스스로를 응원하는 ‘쇼’ 만 연출하자.     


나는 장례식장 입구에 수많게 나열되어 있는 조화를 무심하게 바라본다. 엄숙함 속에서 개똥철학의 ‘호감’이 조화 무리 속 하얀 국화꽃처럼 피어오른다. ‘결국 아름다운 인생의 연출은 자신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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