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당신의 앞날은 어떤 모습이면 좋을까요?
나의 어머니는 1935년 3월 생이십니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는 2021년 1월에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지금 나는 경기도의 작은 도시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농촌형 마을이라 동네 어르신들과의 조우가 빈번합니다. 보통 보조기구 없이 혼자 걸어서 이동하는 어르신은 거의 볼 수 없습니다. 보행보조용 유모차나 지팡이를 도움받아 걸어 다니십니다. 숱이 많지 않은 머리카락은 온통 흰색이고, 얼굴의 주름은 세월의 숫자만큼 깊이 패였습니다. 아무 표정이 없는, 험난한 인생을 고백하는 듯한 얼굴입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나의 어머니’가 교차하는 순간을 자주 마주합니다.
김태욱의 시집 <스무살, 우리>에는, ‘깊어지다’라는 제목의 시가 들어있습니다. ‘어려서 깊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까만색이라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뭐가 나올지 모르고/ 끝없는 깊이에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까만 밤이 깊어지고 생각이 깊어지며/ 나의 한숨도 깊어질 때/ 너를 향한 마음마저 깊어져// 너무 무서워/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내 엄마의 스무살은 이렇게 무서웠을 것입니다. 삶이 녹록치않음에 흔들렸을 것인데, 그것은 갓난아이 때 엄마의 곁을 떠난 엄마의 엄마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외할아버지는 엄마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동네 사람들에게 하소연을 했을테고, 동네 사람들은 엄마의 슬픈 아픔이 깊어지지 않도록 하얀 가슴을 내주었습니다.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삼십 대에 엄마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냅니다. 청춘은 머무는 것을 거부하고, 엄마의 사랑은 저세상 아주 먼 곳으로 떠나갑니다. 세상은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고, 엄마의 슬픈 이별은 험난한 고생의 길의 초입이었습니다.
신경림 시인은 <나의 마흔, 봄>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지금도 꿈속에서 찾아가는, 어쩌다 그리워서 찾아가는/ 어쩌면 다시는 헤어지지 못한다는, 헤어나도 언젠가 다시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 나의 마흔이 싫다//.’
엄마의 마흔은 어떠했을까? 신경림의 시처럼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고, 수명의 한 가운데라는 마흔의 생각으로 오직 주어진 문제 풀기에만 전념하셨을 것입니다. 세상의 엄마들한테는 언제나 문제가 주어지지만 정답은 없었을 것인데, 엄마는 슬기로운 지혜로 답안지를 채워나가야 했습니다.
시인 강현주는 <아직 꽃물, 아니 사랑>에서, ‘지천명이 되던 늦가을, 봉숭아물을 들이며 층층히 번져가는 꽃물의 추억을 본다/ 비명 같은 끝물의 소리를 듣는다/ 아직 꽃물이라고, 아니 사랑이라고 서리 내린 하얀 창가에 호호 입김을 불어본다//.’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지천명, 엄마는 하늘의 명을 기다렸을지도 모릅니다. 잔뜩 때묻은 자식들, 염치없고 어리석은 자식들 탓에 봉숭아물을 들인 손톱은 닳고 닿아 사라졌습니다. 엄마의 비명 소리는 그저 엄마한테만 들렸을거고, 사시사철 내내 엄마는 호호 입김이 나오는 겨울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숙미 시인의 <어쩌다, 예순> 시집에는 이런 시가 있습니다. 시 제목이 시집과 같습니다. ‘조금씩 변해 감을 알아채지 못한 어느 날/ 거울 속 낯선 여자가 어쩌다 예순이 되어/ 슬픈 표정으로 나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예순 인생을 감내한 엄마의 얼굴은 굵디굵은 선으로, 투박하게 그려진 유화처럼 울퉁불퉁합니다. 에누리 없는 삶을 살았을 엄마의 예순은 쉼이라곤 없었습니다. 훌륭한 자식도 없고, 든든한 자식도 없고요. 그래도 엄마는 자식들에게 ‘슬프지 않다. 괜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설가 박범신의 시집 <구시렁구시렁 일흔>의 대표시 ‘구시렁구시렁 일흔’은 이렇게 끝을 내고 있습니다. ‘삶의 어여뿐 에너지 구시렁구시렁에서 얻는다.’ 박 작가는 이제 나이가 들어 구시렁항아리가 되어 어여쁘게 늙어가고 싶다며 시집의 제목을 정했다고 합니다.
엄마의 구시렁구시렁 역시 깊고, 조용하고, 다정하고 어여뻤습니다. 변함없는 자식 사랑을 물줄기처럼 쏟아내셨습니다. 그 사랑은 언제나 내가 수렴해야 할 일상의 예쁜 참견이었습니다. ‘자외선이 강하니 모자를 쓰고 일을 해라’, ‘항상 차 조심해라’, ‘아내와 아이들한테 잘 해라’ 등. 나의 인식 안에서 항상 자리잡고 있는, 내치지 않고 항상 가슴에 품고 있었던, 엄마가 평생 자식에게 늘 데려다 놓은 구시렁이었습니다.
원로시인 성춘복은 시집 <여든의 하루를 사는 법>에 ‘하루를 사는 법’이라는 시를 실었습니다. ‘어느 중간역쯤 잠시 멈춰 서는 간이역이라도 있으면 내가 나를 놓칠까 두려워하며/ 또 더러는 나를 거부하며 무슨 운에라도 가닿을 것 같은 애매한 기대로 그 하루를 살고/ 어디 괜찮은 나절과 저녁에 가슴 벅찬 노을은 없을지 그런 조우를 나는 하루에 잇댄다//.’
어머니한테 세상은 어쩌면 간이역이었을지 모릅니다. 그 간이역에 자식새끼를 놔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운이라곤 없는 사람이라고 세상을 읽으면서도 기대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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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여든 중반에 엄마는 저녁노을이 사라질 무렵 간이역에 자식들을 두고 결국 떠나십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끝내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엄마는 소풍을 가신 곳에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지 않으셨을 것 같고, 자식은 엄마를 아흔으로 모시지 못함의 아쉬움에 슬프고 많이 아파 했습니다. 죄송함이 갑절이고 그리움이 하늘에 닿는 듯 했습니다. 엄마를 아버지 곁에 모시고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엄마의 답안지에 백점이라는 점수를 매겼습니다. 그럼에도 속절없이 눈물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나는 일찍 퇴근하여 밥을 지어놓습니다. 아내가 퇴근해서 밥과 음식을 동시에 준비하는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서입니다. 부엌에 서서 나는 3년 전 떠난 엄마를 가슴에서 꺼내어 생각으로 느낍니다. 엄마가 지으신 밥과 만들어 내놓으신 음식들의 그리움이어서가 아닙니다. 엄마의 노고와 그 감사함에 친해지지 않았던 죄송한 마음 때문입니다.
며칠 전 아내의 생일이었습니다. 아내에게 미역국을 끓여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미역국 끓일게요?” 내가 말했습니다. “할 수 있어요?”라고 아내가 되묻습니다. “유투브를 보면서…”라고 말하자 아내는 “그냥 두세요!”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래도…”라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엄마가 계실 때는 ‘엄마한테 부탁했었는데….’ 다시 엄마를 떠올립니다.
아내는 “내 생일엔 내가 미역국을 먹어야 하는 게 아니고, 울 엄마가 미역국을 드셔야 한다”며 손수 미역국을 끓였습니다. 겸연쩍어하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며칠 전에 사와 꽃병에 꽂아두었는데, 쉼 없는 시간 탓에 시들어진 노란 프리지어가 보였습니다. 프리지어의 꽃말이, 천진난만, 자기자랑, 청함, 당신의 앞날, 이라던가요? 그중 ‘당신의 앞날’이 마음에 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당신의 앞날은 어떤 모습이면 좋을까요?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