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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Jun 09. 2021

시집 <슬쩍>을 읽고

시란 읽고 나서 ‘슬쩍’하고 싶어야 잘 쓴 시다…

집에 도착해 우편함을 열었다. 노란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얼른 꺼냈다. 역시 기대대로 오인태 형님의 시집 <슬쩍>이다. 주소를 알려드리고 한참을 지나도 소식이 없어, 형님이 ‘슬쩍까먹었나 싶었다.



씻고, 가볍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등을 기댄채 시집을 펼쳤다. 슬슬이어도 속도감있게 읽혔다.


첫 시를 읽는 순간 엄마가 떠올랐다. 가시 같은 자식들 때문에 온몸이 상처 투성이었을텐데, 내색않고 한 평생을 곱디곱게 살다 가신 울엄마!

왜 형님은 이 시를 가장 앞쪽에 앉혔을까?


_품


그 많은 탱자나무 가시가 그 많은 탱자를 상처 하나 내지 않고 품고 있다니


형님은 겸손하다. 몇년 전 남해에서 처음 뵀을 때 알았다. 당시 나는 25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자영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람을 쐴겸 해서 무작정 남해를 찾았다. 갑자기 형님한테 연락했고, 형님의 단골 식당인 촌놈횟집에서 만나 술을 마셨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다. 배려와 겸손의 아이콘, 형님! 시에서도 슬쩍 묻어 나왔다.


_씨앗, 또는 詩앗


싹 틔우지 못하는 씨앗을 얻다 써

단, 한사람 가슴에도 꽂히지 못하는 시를 뭣 하러 써


이미 내 마음 속에 꽂힌 시가 한 둘이 아닌데… 나도 씨앗이고 싶다.


당최 사랑이라곤 모를 것 같은 형님이 사랑을 알고, 아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저 신기하다.


_관념론과 유물론


나는 사랑한다, 고로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다, 고로 나는 사랑한다.


시집에는 생전 본 적이 없어 ‘아버지’라는 단어 마저 생소한 나의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시도 있다.


_아버지


아버지와 맏아들의 나이 끝이 맞으면 앙숙이 된다던가,

끝내 맏상주인 나는 한 줌 치토도 못하고 아버지를 묻고 말았으니


아버지가 나를 낳은 마흔 나이를 넘기고, 머리가 굵어진 큰애가 처음으로 눈을 치뜨고 대들던 날, 꼬박 열흘을 밥숟가락을 들지 못하면서 밤마다 보았다


내 안에서 뜬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계신


형님 또한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원고 마감일이 닥쳐야 필력이 불타 오르는… 피고를 벗어나면 비로소 훨훨 날아갈 듯한 기쁨 또한 형님은 알터.


_원고청탁서


한참, 달포나 남았다가

아직, 열흘은 남았다가

결국, 단 하루밖에 남지 않는


네 시작은 원고였지만 네 나중은 피고가 되고 마는,


나는 시를 사랑고백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사랑하듯 글을 사랑해야 비로소 시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형님의 글투까지 닮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적이 많다.


“결국 시란 읽고 나서 ‘슬쩍’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잘 쓴 시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형님, 시집 잘 읽었습니다. 제가 또 이렇게 슬쩍 입을 닦고 맙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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