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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Sep 10. 2021

마음 속 비워 있는 공간이 있나요

마음 속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생각과 느낌을 만들어내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나 싶을 만큼 높다란 하늘은 그 끝이 보이질 않는다. 천정의 높이가 창의력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하늘을 천정 삼아 바라보는 일, 얼마나 창의적인가. 

가끔 고개를 번쩍 들어 하늘을 향한다. 기분이 좋을 때는 물론이고 화가 나거나 우울할 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늘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놓는다. 자신을 깨우는 의미 있는 공간이 된다. 파란 하늘 위에 글과 그림을 그리며 감정을 토해낸다. 깊은 침묵과 만나는 소중한 시간이다. 몸과 마음을 쉬어가게 할 수 있는 뿌듯한 내 집을 하늘에 장만하는 순간이다.



   혜민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들여다보면 끊임없는 생각과 느낌이 자연스럽게 올라온다. 그런데 생각과 느낌은 비교적 쉽게 알아차리지만, 생각이 일어났다가 그다음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있는 고요함은 잘 인지하지 못한다. 즉 생각과 생각 사이, 느낌과 느낌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고요한 침묵이 자리하고 있는데, 많은 이들은 그 빈 공간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세상에는 다양하고 수많은 형태의 공간들이 존재한다. 첨단시설에서부터 낡고 오래된 공간까지. 공간은 각기 위치에서 나름대로 가치를 내뿜는다. 공간의 가치는 법으로 보호를 받는가 하면 외면의 대상이 되거나 방치되는 경우가 있다. 소리 소문도 없이 공간이 사리지는 경우도 있다. 공간의 인연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귀촌,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실제 실천하여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제법 많다. 주말이 되면 산골에 있는 촌가(村家)를 찾기도 한다. 주중 바쁘게 생활했던 복잡한 마음을 거둬들여 시골집에 풀어놓는다. 

   이처럼 꿈에 그리던 공간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사람은 좋은 공간에 들어가면 우선 마음을 놓는다. 독일의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이 진정으로 거주할 수 있는 터는 자연이라고 했다. 자연은 소박하고 순환하는 속에 약동하는 모든 생명을 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은 거주함으로써 존재하며, 거주는 건축함으로써 장소에 새겨진다.”고 말했다.

   사람은 공간에서 존재한다. 인간은 공간적 존재이며, 공간은 존재를 위한 집과 같은 곳이다. 사람이 그런 공간을 만든다. 사람과 공간은 역동적 관계에 있다. 세상에 공간이 없으면 사람은 숨을 쉴 수가 없다.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곳이 바로 공간이다. 그래서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의 역작》에서 “인생을 바꾸려면 공간을 바꿔야 한다.”고 했던가.

  옛날 가옥에는 사랑방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그곳은 손님과 정담을 나누는 문화 쉼터였다. 인정을 나누는 곳이었다. 사랑방에 모여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했다. 집의 애경사를 슬퍼하고 축하해주는 공간이었고, 정과 품격을 잃지 않는 장소였다. 지금은 사라진 사랑방 같은, 그런 공간을 내 마음 속에 만들어보면 어떨까.

   마음 속 그 곳에 자기를 위한 책을 쓰고, 자신을 위한 음악을 만들고, 자기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만드는 거다. 자기 이야기가 가득한 공간을 만들어보는 거다. 그래야 자존감이 생기고 매력이 커지는 거다. 

   인간의 품격은 공간에서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밤잠을 준비하면서는 마음의 공간 속에서 하루를 성찰하고, 내일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 번호 키가 필요 없는 마음 속 공간을 만들면 우선 사랑부터 가득 채워 놓는다. 사랑할수록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공간적 전환’이 일어난 이야기가 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냐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힌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리 우는 깊은 산곬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곬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같은 건 덜어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날이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를 원문(原文)으로 옮겨왔다. 백석은 이 시를 1938년에 발표했다. 당시 백석은 함흥의 영생고동보통학교 영어 교사였다. 연인 김자야를 만나 사랑에 빠졌던 때였다. 경성 청진동에 숨어 살던 자야를 만난 후 함흥으로 돌아가면서 이 시를 누런 미농지봉투에 적어 자야에게 건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석으로부터 ‘자야’라는 아명(雅名)으로 불렸던 그녀의 본명은 ‘영한’이다. 1916년생인 영한은 16세의 나이로 ‘진향’이란 이름을 받아 기생이 된다. 백석과 영한은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백석의 부모는 영한과의 결혼을 반대한다. 결국 헤어진다. 영한은 성북동 배밭골을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한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은 영한은 7천여 평의 대원각 터와 40여 동의 건물을 절로 만들어주기를 법정에게 요청한다. 

   1997년 12월 대원각은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탄생한다. 영한은 ‘길상화’라는 불명을 법정으로부터 받는다. 영한은 “1000억 원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는 말을 남기고 1999년 11월 눈을 감는다.

   마음 속 공간에 백석을 고이 품었던 영한은 ‘자기만의’ 공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웠다. 분노와 적개심의 공간이 아닌 이루지 못한 사랑을 가득 담아서. 길상사는 우주를 가득 채울 만큼 영한의 사랑을 품었다. 백석과 자야를 하나로 연결한 의식 공간이 바로 길상사다. 그녀에게 길상사는 생각과 느낌을 담고 있는 마음 속 공간이었다.

   마음 속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생각과 느낌을 만들어내고, 자존감을 높여주는 공간이다. 고요 속에서도 ‘나’라는 존재를 일깨워주는 ‘수양의 공간’이다. 마음 속 공간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사랑과 행복을 차곡차곡 채워가는, 마음 속 공간을 만들어보자. 영한의 길상사와 같은 사랑의 공간을 마음에 지어보자. “이제까지 잘 살아왔다. 앞으로도 잘 살아가자”고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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